나는 박노해 시인을 잘 모른다.
<노동의 새벽> 정도를 힐끗 보았을 정도라고 해야 맞다.
얼마 전, 우연히 박 시인의 '그 겨울의 시'를 보았다.
순수함과 사랑이 꾸밈 없이 잘 녹아 있었다.
할머니 품속에 배운 이웃 사랑의 마음을
잊지 않고 살려내는 감성.
그 겨울의 시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 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 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나는 다시 그의 사진집 <나 거기에 그들처럼>을 보았다.
2010년에 출판된 책이다.
이 사진에서 제목의 영감을 얻었을까?
표지는 타이포가 특이해 사진을 무심코 지나쳤는데
책 뒷 부분, 박 시인의 글을 읽고 이 사진에 다시 눈길을 두게 됐다.
안데스 고원의 해발 4500미터
척박한 대지에서 마을 사람들과 두레 노동을 하며
감자를 수확하던 그분들이 나에게 치차를
따라주며 건네던 말을 그대에서 전한다.
"힘들 때 서로 기대는 인정이 살아 있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관계만 살아 있으면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지요.
기쁨이 없고 노래가 없는 노동은 삶이 아니지요.
그라시아스 알 라 비다 내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노을이 지는 사막 지평에 올리브 나무들이 서 있고
작은 마을 흙집 지붕 위에 흰 빨래가 펄럭이고
사원에서는 저녁 아잔 소리가 길게 울리는데,
낙타를 탄 가장은 양떼를 몰고 귀가하고
집집마다 저녁 빵을 굽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공터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축구를 하고
하루 일을 마친 사람들은 흙벽에 기대 앉아
샤이를 마시며 나르길라를 피우고 있었다.
가난했던 때, 우리의 시골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기 때문에
시인의 생각에 공감이 갔다.
세계의 진실은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 만큼 보이는 것'이다.
"사랑한 만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라보는 게 아닌 그들 가까이 뛰어들 용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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