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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생태신학적 진화에대한 이야기-1

하느님을 사랑한 여성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3. 22.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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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진화에의 갈망[진화하는 신앙]
도희주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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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3.20  10: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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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주말 아침을 겨우내 멈추었던 동네 산을 오르는 일정으로 시작했다. 어느새 얼음은 녹아 계곡을 따라 졸졸졸 흐르고 있었고, 발로 전해오는 흙의 느낌이 보드랍고 정겨웠다. 집 앞 목련과 개나리도 어여쁜 꽃잎을 봉우리 속에 감추고 있었다. 봄은 이미 우리 옆에 찾아와 생명의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봄이 오면 왠지 모르게 설레는 마음처럼 아른아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새싹이 올라오는 것처럼 은은하게 내 가까이에서 피어오른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상처받았던 기억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으며 나를 감싸 안는다.

  
 ⓒ박홍기
우주의 진화

천지 창조의 여섯 번째 날, 하느님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시며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그래서 당신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그 내면에 하느님을 향한 아지랑이 같은 갈망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이 추구하는 육체의 에너지를 욕망이라고 한다면 신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영적인 에너지는 갈망이 된다.(<인간 마음의 형성> (아드리안 반 카암, 국태원, 1996)참조)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께로 가서 쉬기까지는 참 평안함이 없었습니다”고 고백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완전하신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

빅뱅을 통해 만들어진 혼돈의 에너지 속에서 수소와 질소가 융합하고 최초의 바다 생물이 생겨나고, 직립보행을 하는 네안데르탈인이 출현하기까지 그 진화와 생명의 길을 다시 더듬어 본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그의 책 <우주이야기>에서 “우리 DNA 유전자 속에는 이미 이러한 진화에의 갈망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길의 끝에 도달해야 할 곳이 바로 소통과 관용으로 순환하는 우주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동양의 사상가 장자와 노자도 ‘자연과 같은, 이 생명의 순리를 알고 행하는 것이 바로 도(道)’라고 했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수증기가 되어 다시 올라가 구름이 되고 우리에게 비가 되어 돌아오듯이, 풍성한 열매를 맺었던 나무가 잎을 모두 떨어뜨려 흙을 비옥하게 하고, 그 영양분을 뿌리로 흡수해서 다시 열매를 맺어 가듯이…. 우리 또한 이러한 변화와 나눔의 자세를 잊어버리면 성숙해 갈 수 없다.

“진리가 무엇인가?” 사유했던 서양 철학자들을 통해서도 이러한 진화에의 갈망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인 산파술을 통해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내도록, 그래서 고통을 통해 성숙해 가도록 재촉했다. 니체도 우리에게 스스로를 뛰어넘는 초인이 되라고 요청했다. 특히 헤겔은 그의 절대지성을 설명하는 글에서 우리는 정반합의 노력을 통해 계속해서 완성의 단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진 자이지만 미래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존재”라고 말했다. 사르트르 또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특권과 본질을 지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어떻게 고유하게 구현해 갈 것인지 고민하라고 권유한다.

  
 
예수님의 소통과 나눔

진정한 변화와 나눔은 소통으로 가능하다. 소통에는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배려의 마음이 기본이다. 인류가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소통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하시며 자기 뜻을 하느님께 의탁한 후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신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오셨고 성체성사를 통해 기꺼이 우리 영혼의 밥도 되어 주고 계시다.

산에 오르면 겸손해진다. 우리가 함부로 밝고 다니는 흙 한 줌, 나무 한 뿌리, 무덤덤한 바위 하나도, 나보다 훨씬 긴 시간을 견디어 왔음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를 살피면 물질계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의식 수준들도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됐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올바르다고 통영(統營) 되었던 노예제도, 인종차별, 여성차별 사상 등이 이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대전제에 굴복하고 있으며, 불합리한 부분들은 계속해서 개선되어 갈 것이다. (<나는 예수를 이렇게 본다> (정양모, 햇빛출판사, 2012) 참조)


상대성원리를 통한 자유와 은총

얼마 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소개한 한 블로그( http://hkpark.netholdings.co.kr )에서, 가슴 떨리는 문장을 접할 수 있었다. 바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였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기도 한 이 문구가 신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은 블로거의 평생을 좌우한 철학이었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는 생에 대한 많은 고민을 시작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원리를 접하며 이 문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움직임의 속도가 빛과 같이 빠를 때 물질의 질량(m)은 E=mc2의 공식에 따라 막대한 양의 순수 에너지(E)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c는 빛의 속도)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은 빛의 속도인 초속 30만Km를 넘을 때에는 멈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은 정지된 사람이 봤을 때 상대적으로 느리게 가는 것이다. 이 원리를 토대로 하여 공간의 개념에서도 4차원의 세계가 가능한 것으로 설명된다.

블로거 박홍균 씨는 이러한 원리를 살펴보며 ‘각자의 삶과 가치관의 기준도 각각의 판단 영역에 달린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 세상의 사람들에 대해 비로소 관대해졌고, 자신도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주관적인 깨달음이기에 분명히 이견에 있을 수 있겠지만, 하느님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해서도 당신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으며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학 분야의 비전문가이자 평범한 신앙인인 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의 핵심을 ‘각 인간을 향한 성령의 맞춤형 사랑이 아닐까? 하고 묵상해 보았다. 각 개인은 타인과 달리 고유하게 나만을 위해 속도와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오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시공간이 있기에 부활하신 주님은 여기에서도 나타나시고 저기에서도 나타나시며 그 신비의 실체를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다고도 볼 수 있다.(<상대성 이론과 예수의 부활> (전헌호, 가톨릭출판사, 2012) 참조).

갈망으로 진화하는 삶

신의 은총은 세상을 가득 채우지만 또한 이 세상에 하나뿐인 독특한 나를 향해서도 특별하고 고유한 방법으로 오신다. 그러한 은총을 만나는 날, 하느님이 주시는 그 사랑을 만나는 날,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나 마음과 영혼의 치유를 받았던 사람들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세리에서 사도로 변화되었던 마태오(마태 9,9-13), 일곱 마귀에 싸인 절망의 삶에서 희망의 삶으로 돌아선 막달라 마리아(루카 8,2), 의미 없는 삶을 살던 ‘야곱의 우물가 여인’이 예수님을 전하는 선교사로 변화된 것처럼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요한 4,1-42).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마음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가던 길을 돌아서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었다(루카 24,13-35). 우리도 언젠가는 얼굴을 맞대고 만날 하느님을 희망하며 지금 여기에서부터 그분의 모습이 되어가기를, 진화해가기를 갈망한다.

많은 사람이 내가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는 남자들로 가득한 가톨릭신학교에 다닌 것을 알면 질문한다, ‘왜 신학교에 갔어요?’라고. ‘나의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라고 답한다. 이 또한 당신을 향한 수많은 갈망 가운데 하나이며, 나에게 응답한 하느님의 고유한 은총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얼마 전 따뜻한 마음을 지닌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탄 적이 있다. 내게 해준 ‘점점 예뻐진다’는 말이 기분이 좋으면서도 쑥스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드는 당당한 느낌과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래, 나는 진화하는 신앙이니까!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계속해서 완전하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진화해가는 갈망의 존재이니까 말이다!’

 

  
 

도희주 (수산나) 관악산과 청계산이 마주보고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옹기종기 삶을 배워가고 있다. 가톨릭신학대학 신학과를 졸업했고, 2011년 100여 곳의 국내 성지를 소개한 가족 순례기 <햇살 속으로>를 집필했다. 또 다른 나인 이웃들과 함께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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