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동헌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문화재 관리를 위해 문이 잠겨 있어서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잠겨있는 문 사이로 동헌과 동헌 뜰을 살펴볼 수는 있었다. 생각보다 아담한 동헌 건물과 옛 여산 부사들의 선정비와 함께 척화비(대원군이 1871년에 세운 서양세력을 물리치자는 내용)가 서 있다.
여산동헌 백지사터 성지
여산동헌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동헌에서 고문당하고 사형을 선고 받았을 선조들의 고초가 눈앞에 떠올랐다. 동헌 옆의 초등학교 학습장 자리에는 옥터가 있었다고 한다.
옥에서 얼마나 굶주렸으면 처형된 시신의 옷을 살펴보면, 겨울에 입었던 옷인데도 솜을 다 뜯어먹어서 옷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처형장(백지사터, 배다리, 숲정이, 기금터, 뒷말치명터)에 가서 교우들의 목에 씌웠던 칼을 풀어주면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혹형과 굶주림에 신음하면서도 함께 아침저녁 기도 등을 공동으로 합송하며 기도의 힘으로 고통을 이겨냈다.
특히 고산지역 넓은 바위 교우촌에서 잡혀온 김성첨(62세) 순교자의 행적이 돋보인다. 그는 종손과 재종손 등 일가족 6명과 함께 옥고를 치르고 있었는데 “만 번 죽을지라도 배교는 천만부당한 일이다.”라고 신앙을 증거하며 서적과 상본의 출처에 대해서는 대대로 교우집안이라 물려받은 것이고 아는 교우는 같이 끌려온 교우가 전부라고 답하며 모진 고문에도 이웃에 폐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함께 고통받는 교우들을 위로하며 “우리가 (치명할) 이 순간을 기다렸는데 천당진복을 받으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도 참아 받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甘心; 고통과 괴로움을 기꺼이 참아 받음)으로 참아 받으라.” 하였다. 이러한 교우들의 모범적인 옥중생활로 인하여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옥사장이 회심하여 순교하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어느날, 옥사장이 단꿈을 꾸었는데 하늘에서 배교하지 않았던 일곱 명에게는 화관을 씌워주고 한 사람에게는 씌웠다 벗겼다 했다고 한다.
옥사장이 그 이유를 물으니 배교자가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잠에서 깬 옥사장은 배교자 대신 치명하겠다고 자청하고 순교했다고 전한다. 이는 이미 그가 교우들을 통해 은총으로 신앙의 깊이를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김성첨과 함께 끌려 온 교우들은 1868년 12월4일 또 12월 23일 지금은 논과 밭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숲정이 성지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그 시체들이 미나리꽝에 버려졌다. 밤을 틈타 다른 교우들이 건져내어 천호산 성지 주변에 가매장 하였다가 1983년 천호성지 성인들 묘소 밑의 무명순교자 묘소에 안치하였다.
동헌과 붙어있는 백지사터에 들어가 본다. 백지사형(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붙여 질식시키는 것)은 형벌 중에서는 간단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그 고통이 크기에 처형자들이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숨막히는 고통 중에서도 주님만은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이 떠올라 마음이 숙연해 진다. 백지사터 성지에 있는 십자가 앞에서 부족한 나의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며 가족기도를 바쳤다. 여산에는 이외에도 원님들이 놀이하던 연못과 누각으로 이뤄진 기금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집과 주차장이 되었지만 박해시절에는 여기서 순교자들에게 화살을 쏘아 맞혀 죽였고 여자들은 연못에 넣어서 수장시켰다고 한다.
참수터로 알려진 배다리 옆에는 미나리꽝이 있어서 시신을 이곳에 버렸다고 한다. 또한 인근에는 ‘뒷말 치명터’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장날을 골라 정자나무 가지를 늘어뜨려 목에 건 다음 가지를 놓아서 교우들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죽였다고 한다. 여산 곳곳에 순교와 믿음의 흔적이 남아서 순례자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여산동헌에서 바라본 여산면 주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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