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옆에 막달라 마리아는 없을까?
지난 8월 16일 약 100만의 인파가 모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먼 이국 땅에서 오신 노년의 교황께서,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에 밝은 웃음으로 화답하시며, 단식투쟁 중인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를 따뜻이 안아준 감동은 뜨거웠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대 교황들과는 다른, 소박하고 파격적인 행보로, 전세계인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 나 또한 진심 어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느껴 보고자 거리에 나가게 되었다. 오직 그분을 보기 위해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이 천년 전 예수를 따라다니던 수 많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시에 온전한 인간으로 대해주지 않던 여성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인정해 주셨음도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의 교황 바로 옆에는 수많은 남성 주교와 사제들만이 함께하고 있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
교황은 방한 첫날인 주교회의 연설에서부터, 마지막 일정인 명동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노력’을 강조했다. 사제들에게는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내치지 않기’를, 수도자들에게는 ‘청빈의 마음을 잃지 않기’를, 신자들에게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는 마음을 간직하기’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이 마음 편하게 들어와서 쉴 수 있는 위안과 희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설파하셨다.
교황은 ‘한국교회는 번영하였으나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 있다’고 언급하셨다. 따라서 순교자의 피로 굳건해진, 한국교회가 공생활의 첫 시작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고 선포하신 나자렛 예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8월 25일 주교회의에서 한국주교들과의 만남연설’ 참조). 교회의 뿌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는 그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기쁜 소식은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19 참조)
교회 안에서 늘 가난한 여성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했던 ‘가난’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일차적으로 인간의 존엄이 위협받는 가난의 상태는 우리모두가 힘을 합해 개선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난의 모습 외에도 인간은, 삶안에서 심리적, 영성적, 정신적 가난을 불러오는 다양한 규율과 제도를 만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 안의 여성인 나는 늘 목마르고 가난하다. 개인의 지식여부나 자격여부에 상관없이 가톨릭교회의 최종 의사결정권이나 지도권을 여성이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든다면,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특별법의 핵심내용인 수사권과 기소권을 달라는 요청이 거부되고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특별법이 유가족에게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성의 의견과 판단이 반영되지 않은 로마가톨릭 교회의 교도권 결정은 교회 여성들에게 늘 목마른 우물이 될수 있을 것 같다. 주교건 수도자건, 평신도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말씀과 교의 해석에 대한 최종 판단과 교회운영에 관한 결정권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전세계 남성 주교단의 의견에 맡겨져 있다. 여성들은 같은 인간이며 신자라는 기본적인 입장에서만, 남성 주교단의 결정을 이해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역대 여러 교황들은 여러 번의 회칙을 통해 여성사제서품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마치 교회에 저항하는 불의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러나, 여성사제서품은, 가톨릭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단을 판별하는 핵심적인 내용인 교의(Dogma)에 들어가는 사항이 아니다. 여성사제서품은 시대에 따라 가변을 정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하며, 하느님 백성 모두가 풍요로운 교회를 이루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숙고해야 할 ‘주제’이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프란치스코 교황과 예수는 닮았다. 그의 참된 행동과 언행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교황의 모습이라도 보려고, 몇 시간 전부터 그 길에 서서 기다리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 행보를 보며, 이 천년 전 팔레스티나 땅에서 파격적인 언행으로 많은 이들의 추종을 받으셨던 예수의 모습이 겹쳐졌다. 예수는 그 당시 억압받고 소외되던 여성에게도 그의 제자 단에 함께 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후원자이자 후원을 받는 이가 되었다.
예수의 곁에서 그를 도왔고 그의 죽음에 끝까지 함께 했으며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확인한, 대표적 사도로 막달라 마리아를 빼놓을 수 없다. 정경 외에도 막달라마리아 복음, 토마스 복음이라고 전해지는 외경들을 통해 예수가 그녀에게 선물한 인간해방과 완성을 볼 수 있다.
<토마스 복음서>를 보면 여성에 대해 혐오적이었던 베드로가 여자인 마리아를 제자로 삼지말자고 예수께 말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여성관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평등선언을 하신다. “내가 그녀를 ‘안드로포스’ 즉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하신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여자를 불완전한 인간으로 생각했던 당시의 일반적인 상황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막달라마리아를 성의 구분 없이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고 온전한 인간이 되는 기회를 주시고자 한다. 분실된 1-6장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마리아 복음서> 앞부분 7장을 보면 그녀는 “물질이란 무엇입니까?, 영원한 것입니까?” 등과 같이, 진지하게 예수께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프란치스코 교황 옆에 막달라 마리아는 없을까?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가난함에서의 풍요를 교회 안의 여성들에게 허락해 주고 있지 않다. 여전히 현 세계는 이슬람무장단체인 ‘보코하람’이 여성들의 교육을 반대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즉, 이들은 퇴교 길의 여학생 250여명을 집단 납치하여 노예시장에 팔겠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기도 한다. 성공회에서도 여성사제가 주교 품을 받는 문제로, 오랜 시간 갈등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하느님 백성과 교회에 관한 최종 판단권을 가진 주교단속에 여성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시작은 여성부제 허용, 여성사제 서품이 될 것이다. 더불어 중세기이후 금지된 교구사제의 결혼도 풀렸으면 한다. 결혼은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초대교황인 베드로도 결혼했던 사람인 만큼, 현대사회에 맞는 교회운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성들이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교의와 교리가 아니라 여성의 마음과 정신이 반영된 교의와 교리도 듣고 싶다. 그래서 본당의 미사 때에,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누구보다 열심히 복사를 서는 여자 어린이들이 언젠가는 신학교 마당에서 남학생과 자유롭게 산책하며 . 강의실에서 진지하게 신학을 익히며 함께 사제실습을 하는 광경을 보고 싶다. 그녀들이 구원자이며, 희망을 주는 예수를 본받아 도움을 요청하는 이를 내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목자로 성심껏 활동할 수 있는, 그런 날을 오기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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