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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와 제주도 정난주 마리아묘 성지에서 느낀 생각

성지_햇살속으로/두메꽃 사랑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9. 2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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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를 하면서 황사영 백서사건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갔다. 황사영 알렉시오 선조의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정약용 선생 가문의 장녀라는 점도 뭔가 사연이 줄줄이 엮여나올 것만 같았다. 황 선조가 백서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그의 나이 27.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유복자로 16세에 과거에 급제했던 촉망 받던 젊은이가 어떤 사연으로 백서를 쓰게 되었을까?

며칠 전, 논현동 성바오로서원에 들렀다가 <피의증거>라는 책을 발견했다. 황석두루가서원에서 지난 1994년에 출간한 책인데, 저자는 KBS PD 출신인 전세권 씨다. 그 또한 황사영의 삶이 드라마틱해 10년 동안 취재하고 준비하여 이 책을 냈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황사영 알렉시오의 초상

이 책은 조선 초기 천주교 인맥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책이다. 이승훈, 권일신, 주문모 신부, 정약현, 유항검, 이존창, 정약용, 강완숙 등 초기 천주교회 지도자들의 활동상이 이야기 속에 엮여나온다사건과 상황 중심으로 전개된 르포르타주(기록문학?) 소설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캐릭터 묘사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 조선 교구를 관할하던 중국 교구장 고베아 주교에게 전달하기 위해 A3 용지보다 조금 더 큰 비단에 쓴 편지라고 해서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1 3311자로 이뤄진 이 편지는 발각을 피하기 위해 옷감속에 감출 수 있도록 했는데, 보내기 전에 그것이 발각돼 일이 커지고 만 것이다. 1 3311자는 10포인트 크기로 설정한 아래아한글 A4 문서 8페이지 분량이다.

당시 조선은 정조대왕이 죽자 노론 벽파 계열의 힘을 실어주던 대왕대비 김 씨가 천주교에 관대했던 시파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때 발생한 박해가 신유박해이다. 박해가 심해지자 이를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주 신부는 스스로 관아에 찾아가 자수하여 새남터(지금의 용산역에서 한강 쪽에 위치)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게 된다. 황사영은 당시 주 신부를 영적 스승으로 여기며 전적으로 신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주 신부는 중국 가톨릭학교에서 배출한 가톨릭 사제 1기로서 신앙심과 지력을 갖췄던 분이었다고 한다. 이런 신부와 황사영의 만남은 거의 운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뛰어난 지력을 지녔던 황 선조는 20대 젊음의 패기에 넘쳐있을 때였다. 주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았고, 주 신부로부터 전해들은 서구 문명에 대한 소식은 젊음의 혈기에 불을 당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경기도 양주의 황사영 알렉시오 묘

<천주실의> 저자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의 마태오리치가 중국에 천주교를 전래할 때 그의 뛰어난 지략이 큰 작용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주문모 신부로서는 황사영 같은 지적 능력을 갖춘 신자들의 힘을 크게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여성 신도로서 큰 활동을 했던 강완숙 골롬바를 주 신부께서 전적으로 신뢰했던 이유가 남성을 뛰어넘는 추진력과 지력 때문이었다는 것을 놓고 볼 때 이런 추측이 가능해진다. 중국과 비슷한 방법으로 조정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하자는 게 주문모 신부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에 황사영 백서에는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만들어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당시 조정에서는 아연질색했을 것이다. <황사영 백서>는 전후 사정을 살펴보지 않고 단순하게 그 내용만 보면 의아해할 부분이 없지 않지만,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단순히 신앙의 자유만을 위해 그가 그런 과격한 제안을 했다고 볼 수 없다.

남편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아 순교하자, 그의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결

제주 대정의 정난주 마리아묘

6년만에 얻은 어린 아들(황경한)을 데리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중간 기착지인 추자도에 들렀을 때 어린 아들을 그곳에 두고 떠나게 된다. 어린 아들에게 노비로서 삶을 살게 하는 것보다 외딴 섬에서 평범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문에서 태어나 젊어서 남편을 잃고 종으로 귀양가는 그의 삶은 보통의 눈으로 보면, 기구한 운명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의 길은 영원한 길이었다. 어린 아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품 안의 아들을 외딴 섬에 두고 떠나는 어머니의 마음은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을 지켜보는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묵상을 했다. 시메온 에언자가 마리아께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 35)라고 예언한 것처럼 정난주 마리의 삶 또한 칼에 꿰 찔리는 아픔의 삶 그 자체였다.

정난주 마리아묘 입구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순교의 삶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에서 그런 순교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정 마리아의 잘 꾸며진 묘소 주변에서 나는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어떤 것이 순교의 삶인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오늘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을 이미 갖고 있으면서도, 늘 걱정하는 나의 삶은 세태 탓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진정한 나의 가치를 알고, 있는 그대로를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그 게 바로 순교의 삶이지 않을까.

그가 순교의 삶을 마감하기까지 추자도에 두고온 아들 경헌과는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편지가 있어서 여기에 싣는다. 지금도 추자도에는 황사영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정난주 부고편지 번역문(의역)

추자도 예초리에 귀양살이하는 황 서방 본댁에 삼가 드림

                                                기해년(1839) 정원 23일 대정 서정리 주인 김상집
                                                                    
두 번째 쓴 서장(書狀: 편지)

종전에 뵈온 바 없사오나 소식 종종 들어아옵더니 근래에 소식 듣지 못하오니 매우 딱하옵니다.
추위가 심한 요즘 기체후(건강) 어떠하온지 알고자 하옵니다.

어른(당신)의 이곳 대부인(大夫人: 모친) 정씨가 불행하여 지난해 2월 초하루 묘시(5~7시 사이)에 별세하신고로 장례를 잘 지냈사옵고, 부고 편지를 진작에 보냈사옵니다. 그러나 지금껏 회답이 없어서 의아해하던 차에 추자 사람 이 서방 편에 듣자와 안부를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부고가 전해지지 않은 듯 하오니세상사 가이없사옵니다.
이곳 주인 도리에 차마 박절하옵기로 제사와명절 차례를 다 지내오니 그리 아옵소서. 마침 인편이 있기에 다시 자상한 편지를 하오니 그리 아시기바라오며, 회답을 인편에 즉시 전하옵소서.
말씀은 한이 없사오나. 총총히 줄여서 올립니다.

부고편지 출처: 제주 용정성지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 박물관

관련 글: 황사영 알렉시오 선조 묘와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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