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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우물 9월호 매일묵상 기고글(도희주, 수원교구 별양동 성당)

겨자씨 소식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8. 17. 16:51

본문

1) 9 1일 토요일

독서: 1코린 1,26-31

복음: 마태 25,14-30

제목: 땅속에 숨겨버린 은총

18, 그러나 한 탤런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묵상

오늘 주인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은 한 탈렌트를 받은 종에게 ‘모진 분’으로 불려집니다. 과연 하느님이 ‘모진 분’이실까요? 바로 한 탈렌트를 받은 종 스스로의 모습이 이렇게 매섭고 독하기에 하느님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을 남 탓 또는 하느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모습에서 바로 악하고 게으른 종의 모습을 봅니다.

부부간에도 자신의 단점을 먼저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또한 저의 단점을 인정해 버리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제 탓이 될 것 같아 쉽게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10여 년 동안 늘 자신의 옳음만을 강조했던 저는 오히려 오만과 독단의 성에 갇혀 메말라 버린 영혼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단점을 인정했던 배우자의 얼굴에는 세상과 자신을 향해 웃어줄 줄 아는 맑은 웃음의 꽃이 피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상대방을 이해해주며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은총은 두 배로 불어납니다. 약점과 단점이 탈렌트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쓸모 없는 종은 상황을 변화시키도록 받은 한 탈렌트의 은총마저도 숨겨버립니다. 종이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풍성한 은총으로 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하느님은 당신 혼자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사랑과 나눔으로 이 세상이 더욱 충만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한 탈렌트는 요즘 돈으로 1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갖기에 적은 돈이 아닙니다. 우리가 변화되기에 충분한 기회인 셈입니다. 고인 물은 썩어버립니다. 우리들도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인정하며 다른 이들을 진실되이 만날 때 서로서로가 활짝 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2)9 3일 월요일

독서: 1고린 2, 1-5

복음: 루카 4, 16-30

제목: 진정한 회개의 때

30,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묵상

나자렛 사람들은 골이 단단히 났습니다. 자신들과 어울려 지내던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언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깊이 숨겨 두었던 진정한 회개의 때를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카리스마가 넘쳐납니다. 하지만 나자렛 사람들은 세상적인 욕심에서 가난해지고 싶지도 않고 해방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또한 눈 앞에 있는 영원한 진리를 인정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마을 벼랑에서 예수님을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이 내 마음에 깊이 박혀서 빠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은총과 구원의 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태어났기에 하느님의 성향처럼 살아가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 본성을 알려주는 예수님의 말을 나자렛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언젠가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배울 때 누군가 제게 직언을 해주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컴퓨터 활용이나 업무 면에서 좀 더 능숙해질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의 말을 인정하였지만 당장은 나의 사정을 더 이해해 주지 않는 것이 서운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실력 때문에 좋은 기회들을 많이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그때 그의 말을 더 새겨 들었더라면!’ 하고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우리의 마음과 삶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시는 예수님의 자취 때문에 너무 아픕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기쁜 소식입니다. 쓴 약이 몸에 좋듯이 기쁜 소식은 자신의 내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고통과 함께 합니다.

 

 

3)9 4일 화요일

독서: 1코린 2, 10-16

복음: 루카 4, 31-37

제목: 온전한 거룩함

35,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묵상

더러운 영도 영이기에 사람들보다 먼저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거룩한(sanctus)’이라는 말은 분리(qados)’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어원으로 합니다. 가장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던 지성소(Sanctum)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계약의 궤를 넣어두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어떠한 죄악도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본성인 거룩함을 온전히 지니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갈릴래아에서 복음선포를 시작하시며 더러운 영에 의한 고백 따위는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당신 목숨을 바쳐 우리를 영원히 살리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그것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후부터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계획을 실천해 가십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시고, 세리와 창녀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시며 결국은 십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십니다. 살아가다 보면 내 뜻을 이해해 주지 않는 가족과 이웃 때문에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해 못하는 제자들과 군중들을 끌어안으며 당신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의 계약의 궤가 의미하는 것처럼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완성하십니다. 그것이 온전한 거룩함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며 사랑할 줄 아는 것이 바로 거룩함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저 또한 이미 세례를 받으며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선물 받았으니 더욱 노력해보고자 합니다.

 

 

4)9 6일 목요일

독서: 1코린 3, 18-23

복음: 루카 5, 1-11

제목: 깊은 데서 만난 주님

4,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묵상

얼마 전에 관계성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원 정도의 돈을 빌리는 것이야 조금 안면이 있는 누구에게나 부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이 생겨 몇 천만 원의 큰 돈을 빌려야 할 때 우리는 몇 날 며칠을 고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믿을 만한 사람에게 어렵게 부탁합니다. 세상의 일도 그러한데 인류구원을 위한 동역자로 제자들을 뽑는 일에 예수님께서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셨을 리가 없으십니다. 그러한 고심 속에서 선택된 이가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장모님의 열병을 고쳐준 예수님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로 고기가 잡히지 않는 아침나절이지만 그물을 던집니다(루카 4,38-39).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배가 가라앉을 만큼 고기가 잡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능을 확실히 체험하자 자신의 부족하고 약한 모습이 강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가득 차서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바로 회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님을 치유하는 것부터 주업인 고기 잡는 일까지 서서히 다가오십니다. 얕은 곳에서는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온 삶을 불태운 바오로 사도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교의 뿌리까지 잘라버리고자 했던 그의 열정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삶의 깊은 고통과 좌절은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가 될 수 있습니다.

떠라 달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회개의 시작을 주님은 절대로 놓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첫 제자로 삼으시고 교회의 수장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삶에 오셔서 풍성한 영혼의 삶이 있음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들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5)9 7일 금요일

독서: 1코린 4, 1-5

복음: 루카 5, 33-39

제목: 모든 것을 버리고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상

100살까지 훌륭하게 사시다 돌아가신 한 할아버지가 남긴 삶의 비결은 ~ 00했구나!”였다고 합니다.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구나!’라는 다른 이와의 공감이었습니다. 가정 생활에서 주부로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잔소리입니다. 청소와 정돈의 정성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바로 그 표시가 나는 게 집안 살림이기 때문입니다. 또 가족끼리 같은 문제를 두고도 각자 다른 견해를 가지기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는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이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내 생각과 말에서 헤어나오고 싶지 않습니다.

레위인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잔치를 즐기는(루카 5,27-32)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어둠 속에 숨겨진 것도 밝히시는 하느님의 뜻만을 따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지적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 항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축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우리의 삶도 선물이고 축복이며 감사에 겨운 즐거움입니다.

그리스 문학에서 깊이 있는 토론을 의미하는 단어가 심포지온(symposion, 향연·식탁담화)’이라고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가 먹고 마시는 것은 당신의 삶을 이해시켜 주시려는 예수님의 깊은 마음의 발로입니다. 이 이해의 마음에서 구원은 퍼져갈 것입니다.

형식만 추구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에 ~ 그렇겠구나!’하는 공감을 하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하듯이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내면, 외면의 총체적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6)9 8일 토요일

독서: 미카 5, 1-4

복음: 마태 1, 1-16, 18-23

제목: 하느님과 함께하는 축복의 삶

23,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게시다.’는 뜻이다

 

묵상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기 때부터 타인의 사랑 어린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혼자서는 신앙생활을 풍성히 가꾸어가기가 힘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되리라(창세 12, 1-3)”는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첫 선조로 나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을 거쳐 요셉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던 이들의 후손으로 태어나십니다.

몇 년 전, 오랜 기다림 끝에 입주한 새 아파트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이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혼자되신 시아버님과 함께 살기 위해 좀 낡았지만 근처의 큰 평수 아파트로 이사한 것입니다. 아이들도 저도 처음엔 최신식 시설이 아니라고 속상해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이미 오랫동안 사랑으로 신앙 공동체를 이룬 이웃들이 정답게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드렸고, 작아서 못 입게 된 옷과 학용품은 모두 우리 차지가 되었습니다. 귀한 게 있으면 조금씩이라도 꼭 함께 나누었습니다. 지역 반모임 날은 잔칫날이 되었습니다. 한 평생 수고하신 할머니들께서 막걸리 한잔씩 나눠 드시고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도 추셨습니다. 젊은 엄마들은 뜻을 모아 철학 강좌나 미술 강좌를 함께 수강하고 등산도 다닙니다. 함께 하는 나눔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축복이 더욱 충만하게 다가왔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돌아가시며 우리들에게 남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이 말씀은 결국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의 최종 목표도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우리는 그 소중한 사랑을 알기에 내 삶을 이웃과 나누며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7)9 10일 월요일

독서: 1코린 5, 1-8

복음: 루카 6, 6-11

제목: 소중한 선물, 양심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하고 이르셨다.

 

묵상

언젠가 신학교 동기 신부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 공부시키면서 욕심이 많아져서 고민이다.” 라고 했더니 내 마음이 불편하면 이미 잘못 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답을 해주었습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양심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심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며 기본적인 삶의 기준입니다. 요즈음 마음이 어둡고 불안하면 양심을 따르지 않아서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도 듭니다. 양심대로만 살아도 높은 성덕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오른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인간적인 연민은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양심을 찌르는 얄미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만 찾고 있습니다. 지혜 자체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의 계명에 어긋나지 않게 오른손이 오그라들었던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또한 굳어져 있는 양심을 펴라고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채워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늘 허전하고 배고픕니다.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어디서 충만함을 찾아야 하는지, 뒤틀리고 꼬인 마음을 어떻게 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륜을 일으키는 욕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자신의 영과 마음이 어디서 충만함을 얻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해야 할 곳은 하느님의 품입니다. 그 품에 완전히 안기기까지 우리의 영혼은 늘 외롭고 허전합니다. 이것을 건전한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양심이 먼저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제 협조자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입니다.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오소서 성령이여, 당신으로 이 마음을 채워주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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