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마태 22, 36)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들어 있다고 하신다. 나도 성서에서 가장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라고 시작하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에 토대를 두고 있다. 몇 년 전 대중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7가지 기본 원리도 이 구절을 토대로 하고 있다. 오늘 살펴 볼 훌다라는 여인은 바로 이 신명기 문구의 근원이 되는 율법서의 신성함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 선언하였다. <신명기적 역사>를 쓴 마틴 노트에 따르면, 훌다는 ‘성서학의 설립자’가 되며 또 다른 학자는 그녀를 ‘최초의 성서 본문 비평가’로도 부른다.
훌다는 열왕기 하권 22장 14-20절과 역대기 하권 34장 22-28절에 짧게 등장한다. 그녀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8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아왕'이 통치하던 시절, 그녀는 성전의 예복 담당관인 살룸의 아내였으며 예루살렘 신시가지에 살고 있었다. 요시아왕은 통치 제12년이 되자 당시 만연했던 아세라 목상과 많은 신상들을 불태우며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하였다(2역대 34, 3-7). 그리고 통치 제18년에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보수하게 했는데, 이때 힐키야 사제가 주님의 율법서를 발견하고 요시아 왕 앞에 가져와 읽었다. 책에 쓰인 저주를 듣고 왕은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고 주님의 뜻을 알아오라고 힐키야 사제에게 명하였다. 사제는 훌다 예언자를 찾는다(2역대 34장 참조).
거부할 수 없는 가르침
그때는 이미 대 예언자인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고 활동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왕의 관리들이 왜 훌다를 찾아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그녀 또한, 이미 유다와 예루살렘에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지혜로운 예언자였다. 그녀의 남편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티크와’의 아들이라고 불렸는데 ‘티크와’는 ‘희망’이라는 뜻으로 백성에게 희망을 주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히브리 성경은 그녀가 살던 장소를 ‘미슈네’라고 했다. 이 히브리말의 어근은 ‘가르치다’라는 뜻이다. 훌다는 말씀을 선포하면서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메시지도 함께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유대민족의 역사와 삶에 훌다라는 이름이 친근하게 남아있게 된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역대기 하권 34장을 보면 그녀는 요시아왕의 문의에 하느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리라는 저주를 번복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워, 자기들 손으로 저지른 그 못된 손으로 나의 화를 돋우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진노가 이곳에 쏟아질 터인데, 그 진노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시아왕에게는 “네가 …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다. 또 네 옷을 찢고 내 앞에서 통곡하였다. 그래서 나도 네 말을 잘 들어주었다”고 대답한다. ‘주님을 알아 경외한 이에게는 축복이 내리고, 주님을 저버린 이에게는 재앙이 따른다’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기본적인 관계정립이 선포된다.
유대 문헌과 전통을 보면 훌다에 대한 유대인들의 사랑은 각별하다. 예루살렘 성전 유적 5개의 문중에서 성전 남쪽으로 난 2개의 문이 ‘훌다의 문’이라고 불리며, 유대인들은 이 문을 통해 성전에 올라갔다. 유대인들은 들어갈 때는 남동쪽 문으로, 나올 때는 남서쪽 문으로 나와야 하는 관례가 있었다. 다만, 상중에 있는 사람은 오가는 문을 반대로 출입했다. 즉 순례자들이 반대편에서 오는, 상중에 있는 상심한 사람들을 보고 손쉽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한 유대인들은 정결문제 때문에 성전 주변에 어떤 무덤도 두지 못했는데 오직 ‘다윗집안의 무덤과 훌다의 무덤’ 만은 허용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 평범한 신분의 유대 여성이 몇 천 년의 오랜 가부장적 문화를 견디면서까지 민족의 큰 사랑을 받은 것을 보면, 그녀의 가르침이 준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가 참으로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삶의 근원을 알려주기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교육열은 자타 공인 세계최고가 아닐까. 아이들의 동의를 얻었든 안 얻었든 자식 교육에 동참하는 그 열의는, 세 아이의 어머니지만 늘 자신의 삶을 우선적으로 고민하는 내가 보기에는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 어머니들’이 정말 인생이란 무엇인지, 자신의 자녀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 게 참다운 것인지, 깊이 자문해 보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단순히 현실 생활의 안정만을 위한 지식 교육의 추구가 최선의 방안인지 되돌아본다. 훌다 예언자는 소중한 것을 알아보는 눈을 지녔다. 개인의 길흉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으로 하여금 자신들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깨닫도록 해줬다(2역대 34,23-28). 그 길만이 유대 민족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근원이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철학자 슐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인간의 내면에는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각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의식이 이와 같이 우주적 직관과 감각을 향해 열려 있을 때만이 우리가 갖고 있는 대상적 낱개의 지식이 그 진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우주에 대한 근원적 관심 없이 낱개의 지식만을 암기하는 공부는 탐구의 기쁨과 삶의 신비를 앗아버리고 고통스러운 노동이 된다. 그 고통 때문에 타인에 대해 쉽게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폭력의 폐해를 이미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체험하고 있다. 여기에 존재의 근원을 일깨워주는 종교교육의 중요성이 있다. 훌다 예언자는 우리에게 바로 그 모범을 보여준다.
교육학자 페스탈로치는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관계의 핵이 되는 더 근원적인 무엇이 있음을 본성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우리 내면의 감각을 통해서다. 그 믿음과 사랑을 주는 것이 자신을 사랑과 희망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동자이며, 이 세상을 신의 아름다운 창조물로 가리키는 어머니의 손가락이라고 한다. 이렇게 창조된 세상과 자신이 하나됨을 자연스럽게 깨닫는 사람은, 부모님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효가 인생의 모든 행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안다. 훌다는 이렇게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유대 백성들이 행복할 수 있는 최고의 길임을 깨우쳐 주었다.
꽃들에게 희망을
얼마 전, 여학교를 폐쇄한 탈레반 세력을 비판하며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인터넷 블로그에 글을 올렸던 ‘말라라 유사프자이’라는 14세의 파키스탄 여학생이 귀가 길의 통학버스 안에서 탈레반의 총격을 받고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조선일보 2012년 10월 16일 기사 참조).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아직까지도 이 세상 곳곳에 조금씩 남아있는 가부장제의 극심한 폐해를 확인할 수 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인간으로서 배움에 대한 욕구가 있고 교육받을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근대까지의 그리스도교 여성사를 보면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상처임을 잘 확인할 수 있다.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1코린 14,34)’라던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여자는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가르침 아래, 수많은 지혜로운 여성들의 입은 닫힐 수밖에 없었다. 2세기경 유다교(성경)와 헬레니즘(철학)간의 새로운 종합을 꾀했던 신학자 필루메네는, 그녀의 사상을 기록한 남성제자 아페레스의 명성아래 묻혀버렸다. 중세 베긴회 여성들도 성서를 자신들의 모국어로 읽고 해석하며 설교했지만 여성들의 힘을 두려워했던 사회와 교회의 지도층에 의해 결국은 이단으로 판정 받아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유튜브 동영상 Swat Malala yousafzai Second Refort
그러나 이제 21세기의 여성들은 어머니, 그 어머니로부터 전해 받았던 지혜로움을 바탕으로 이 세상을 생명의 축제로 만들어가고 있다. 트리나 포올리스가 지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줄무늬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민하다 애벌레들의 높은 탑을 발견하고 다른 벌레들을 밟으며 그 위로, 위로 올라갑니다. 그러다 다른 애벌레의 몸을 밟고 올라서는 삶에 지쳐서 탑을 내려옵니다. 어느 날 고치 속에서 나비로 변해가고 있는 늙은 애벌레를 만납니다. 늙은 애벌레를 통해 자신들 안에 이 꽃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전해주는 나비가 되는 능력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실을 뽑아내어 겉모습은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욱 아름다운 모습인 나비가 되는 고치를 만듭니다. 얼마 뒤 애벌레들은 자유로운 나비로 변하여 살아갑니다.”
불교에서는 ‘함께 도를 닦는 벗’을 도반(道伴)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도반’이다. 즉 상대의 말과 행위를 통해 나를 비추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나는 모든 이는 나의 스승이 된다. 고치 속에서 나비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늙은 애벌레의 모습에서 진정한 가르침의 여인이었던 훌다 예언자의 삶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유대민족이 진정으로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하느님을 찾는 길을 사랑을 다해 제시해 주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가 잘되고 크게 번성할 것이다.”(신명 6, 3)
도희주 (수산나) 1971년 대구 출생, 가톨릭대 신학과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서강대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주석성서>, <미사의 신비>, <성찬의 9일 기도>, <연옥을 피하는 방법>의 편집과 번역을 담당했다. 2011년 3월 자녀 세 명과 함께한 전국 성지순례책 <햇살 속으로>를 집필했으며 가톨릭 영성을 담은 책을 기획·출판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http://otur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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