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 다녀가셨어요. 생각해보니 중학교 때 이후로 부모님과 그리 살뜰하게 세끼 밥 같이 챙기며 피부 맞대고 지내본 적이 없습니다. 지독하게 속 썩여 드렸던 유별난 딸자식 키우시며 맘고생이 많으셨던 두 분. 귀국길 배웅하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좋은 구경 시켜드리고 좋은 음식 대접하고, 무엇보다 살갑게 웃는 모습 많이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저는 예나 지금이나 감정표현에 참 서툰 사람입니다.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애틋함이 빠르게 교차하는 마음, 채 다스리지 못하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이 복잡한 심사를 어떤 신학자의 글에 담아 전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했더니 떠오르는 학자가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 E. Schleiermacher, 1768~1834)입니다. | | | ▲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 슐라이에르마허는 19세기 초 유럽, 계몽주의와 합리적, 이성적 사고의 발전으로 초래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대응하여 새로운 신학방법론을 모색한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학(주로 개신교 신학)이 근대적 인간관/세계관과 대화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한 신학자 중 한사람입니다. 전통적인 개신교 신학방법론이 성경 본문과 본문에 대한 신조를 그 토대로 삼고, 성경에 입각하여 교리 전통을 쇄신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로 간주하는데 반해, 슐라이에르마허는 개개인의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적 자의식’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성서해석과 교리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경험과 느낌을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개신교 최초의 ‘주류’ 신학자인 셈이지요. 그중에서도 인간의 감정에 대한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은 신학연구에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옵니다.슐라이에르마허에게 감정은 지식이나 행위에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독립적이고 독특한 정신기능인 동시에, 바로 종교가 발견되는 장소이기도 하죠. 대표적 저술 중 하나인 <종교론>(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rn, 1799)에서 그는 종교와 감정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종교는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종교는 보다 깊숙한 인간의 요구에 응답한다. 종교는 형이상학도, 도덕체계도 아니다. 종교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본질적인 직관이며 감정이다. 교리는 정확히 말해 종교의 일부가 아니라 종교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종교는 무한한 존재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게 하는 기적이며, 교리는 그 기적을 반영한다. 마찬가지로 신과 영원에 대한 믿음 또한 종교의 일부라 할 까닭이 없다. 인간은 신 없이도 종교를 가질 수 있고, 이 경우 종교는 전 우주에 관한 순전한 명상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관은 개개인의 내밀한 감정의 기원과 움직임을 전격적으로 신학의 영역에 포함시킵니다. 인간이 감정을 갖고 있으며 그 감정을 통해 ‘느낀다’는 것을 슐라이에르마허는 가장 본질적인 종교 행위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좀 더 설명해 볼게요. 사람의 감정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그 자의식은 언뜻 독립적이고 고유한 것인 듯 보이지만 실은 언제나 의존적이죠. 인간은 다른 이, 다른 존재, 즉 타자(他者)에 대한 관계성 속에서만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습니다. 이 타자에 대한 관계성 속에 의지하여 존재하고 의식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이끌림, 이 이끌림의 근저에는 신이 있습니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자면, 이 무한한 이끌림이 곧 신입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이 이끌림을 감지하는 의식을 ‘신(神) 의식’이라 표현하고, 자의식과 신 의식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절대의존 감정’이라 표현합니다. ‘나’의 감정을 통해 드러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식과 하느님에 대한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신학이라면, 이제 신학의 과제는 우리들 생활에서 발견되는 감정과 느낌을 기술하는 것까지 포함하게 되겠죠. 내 감정의 결을 따라 하느님을 느끼기 슐라이에르마허가 이토록 사람의 감정에 마음을 기울이고 신학의 재료로 삼게 된 배경에는 그 자신의 예민한 감수성과 열린 마음과 따뜻한 성정이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엄숙한 독일 경건주의보다도 구세주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기쁨을 중시하는 *모라비안 교단에 이끌렸고, 새로운 학문과 철학적 토론에 몰두하다 신학교규범을 어겨 퇴학을 당하기도 했죠. 독일 개혁교회 목사가 된 뒤에도 젊은 지성인들과 어울리길 즐겼고, 크고 작은 사회 · 정치적 사건에 가담했으며, 베를린 대학교 창립에도 공헌했고, 교편을 잡았던 시기에는 많은 학생들에게 존경 받는 교수이기도 했죠. 무엇보다도 그는 이미 기혼인 한 여성을 깊이 사모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말아야 했던 아픈 사랑의 경험도 갖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랑의 경험은 간간히 그의 저작을 통해, 또 회자되는 이야기들을 통해 아직도 그의 독자들에게 전해오지요. (*모라비안 교단은 14세기 말 종교개혁가인 얀 후스(Jan Hus)의해 설립되었다. 이 교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방에서 생겨난 보헤미아 형제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깊은 종교적 감정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 | | | 슐라이에르마허의 많은 저작들 중에 <종교론>(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rn, 1799) , <신학연구 개요>(Kurze Darstellung des theologischen Studiums zum Behuf einleitender Vorlesungen, 1830), <신앙론>(Der christliche Glaub, 1830), <해석학과 비평, 그리고 다른 저술들>(Hermeneutik und Kritik mit besonderer Beziehung auf das Neue Testament, 1838) 등은 철학과 신학연구의 고전이 되었습니다.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책은 <크리스마스 이브: 육화(肉化)에 대한 대화> (Die Weihnachtsfeier: Ein Gespräch, 영어로 출판된 책의 이름은 Christmas Eve: A Dialogue on the Incarnation)라는 90쪽 짜리 작은 책자입니다. 1805년 겨울,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선물로 주려고 썼다는 이 책은 플라톤의 대화형식을 모방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의미와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표현하죠. 재미있고 사랑스럽지만, 내용과 형식에 있어 슐라이에르마허 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한 책입니다. 짧게나마 책의 내용을 소개해 볼게요.
<크리스마스 이브>는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가정의 가족들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묘사합니다. 함께 노래하고 선물을 풀어보며 크리스마스 이브의 분위기를 만끽하던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각자가 이해하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각기 다른 성격과 견해를 가진 가족의 구성원들이 논쟁과 설득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이 책의 중심내용이죠. 어느 누구도 이기고 지는 이 없이 팽팽하던 논쟁은 손님으로 초대되어 늦게 도착한 조제프의 말로 마무리 되죠. 조제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크리스마스는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작은 일들과 소소한 기쁨들에 참여하는 것이에요. 기꺼이 웃고 사랑했던 그 모든 일들이요.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내가 세상과 나누었던 뜨겁고 깊은 키스들이었고, 지금 내가 당신들과 함께 하는 이 기쁨은 내 입술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키스에요. 당신들은 내가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이들이니까요. 모두들 이리 오세요. 무엇보다도 소피(파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어린 소녀)가 아직 잠들지 않았다면 이리로 불러오세요. 모두 모여 즐깁시다. 그리고 기쁘고 경건한 크리스마스의 노래를 부릅시다.” 신학자의 의무, 가족 파티를 준비하는 손길과 같은 것 모두들 피아노 앞에 둘러앉아 노래하며 서로를 축복하자, 대화는 마치 뮤지컬과 같이 음악과 하나 되어 깊어가는 크리스마스 이브로 녹아듭니다.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신학자들의 의무란 바로 이런 크리스마스 이브의 파티를 준비하는 손길과 같은 것 아니었나 싶습니다. 팽팽한 논쟁 속에 담겨있는 의미보다도, 결국 그리스도가 이 땅에 주신 큰 축복에 모두 하나 되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지요. 누가 옳고 그른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완벽히 옳거나 그를 수 없으니까요.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해하려하는 과정 속에 그저 모두 함께 조금씩 성숙하는 거죠.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서로에게 이끌리거나 혹은 부딪히는 마음을 차근차근 읽어나가며 인정하는 것. 그것이 슐라이에르마허에게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심성이었고,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좌표였습니다. 너무 낭만적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족들과 함께 모인자리에서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을 떠올린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서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가족이 아니던가요. 다 표현하지 못해도 그 마음 읽게 되는 게 가족 아니던가요. 그 이끌림이 참으로 신비롭지 않던가요. 지금 책상 앞에 앉아있는 제 마음 속 얽히고설킨 감정의 결들에도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아니, 그 기쁨과 슬픔과 애틋함과 서러움과 그리움으로 뒤범벅된 찐득찐득한 감정이 곧 하느님이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오늘 제게는 적지 않은 위로가 됩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책: <신학연구입문> (김경재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83) 쉴라이에르마허에 관한 책들: <쉴라이에르마허 신학의 인간학적 원리> (심광섭 지음 한국신학연구소, 1993), <쉴라이에르마허에서 리꾀르까지 : 현대 철학적 해석학의 흐름> (김영한 지음, 숭실대학교출판부 2011), <슐라이에르마허 생애와 사상> (마르틴 레데커지음, 주재용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85)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사상> (목창균 지음, 한국신학연구소 1991) 조민아 교수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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