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살다보면, 한가위 추석을 기억하는 것이 그다지 쉽지 않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일 년 내내 기후가 비슷하고, 겨울에도 낮에 반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친구들 중에는 팔월 한가위 보름에 무언가 그리움이 느껴져서 우울하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뭐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니까 그렇다 쳐도 미국 친구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처음에는 좀 이해가 안됐었다. 그러나 사실 이 때가 되면 아주 미세하지만 햇살은 투명해 지고, 그 투명한 빛 사이로 보이는 거리의 나뭇잎들이 물들어 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무언가 우울한 듯 차분한 시간을 맞이하다 보면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한다든지, 잃어버린 관계를 그리워한다든지 하는, 인간 본연의 어떤 그리움들이 마음속에서 올라오기도 한다. 무언가 저만치 멀어져간 것들을 기억하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런 날, 특히 서늘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나는 옷 가게를 기웃거리며 따스한 느낌이 나는 스웨터를 사기 좋아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 가게는 암 연구를 위해 사람들이 입다 내놓은 옷, 특히 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남겨진 옷을 파는 이른바 ‘중고 상점’이다. 자원 봉사자 할머니들이 옷을 파는데, 5불 정도면 좋은 것으로 살 수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조카를 암으로 잃어서인지 누군가 죽어가며 못 다 입은 옷을 꼭 잘, 멋지고 예쁘게 입어주고 싶다. | | | ⓒ박홍기 |
이 그리움으로 가득 찬 시기를 보내는 동안 추수감사절이 온다. 우리의 추석 명절과 아마 가장 정서가 비슷한 명절이 추수감사절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묘를 가느라 혹은 어머니가 살고 계신 시골집을 방문하느라 한결같이 길을 나서듯이, 미국은 추수감사절이 되면 모두들 고향으로,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간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에는 딱히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참으로 외로워진다. 처음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미국 친구들이 추수감사절에 어디를 가냐고 물어, 방에서 학기말 페이퍼 쓸 거라고 답하면 모두를 너무 불쌍하다는 듯 동정하다가 자기 고향 집에 같이 가자고 해서 기분 좋게 거절하느라 참으로 곤혹스러웠었다. 사실은 혼자 방에 남아서 추수감사절동안 학기말 고사도 준비하고 밀린 공부도 하면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참 좋은 데 말이다. 추수감사절에 생각하는 예수님의 공동체 ... "이 사람이 당신의 어머니이다" 이제 학생시절도 마감 했고 추수감사절에 함께 지낼 수 공동체가 마련된 지금, 갈 곳이 딱히 없어 보이는 친구나 학생들에게 “추수감사절에 뭐 하니? 우리 집에 와서 식사나 할래?” 하고 말을 건네는 나를 발견한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딱히 돌아갈 집이나 사람이 없는 학생들은 많이 위축되어 보이고 쓸쓸해 보인다. 그래서 추수감사절 날에는 누구든지, 특히 미국사람이 아닌 교수나, 학생들, 가족이 없이 혼자 지내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칠면조를 굽는 것은 내 주제를 너무나 넘은 일이므로, 대신 갈비를 굽거나, 아주 큰 통닭을 내 놓는다. 한국학생들은 김치전 같은 것을 한쪽에서 부쳐내기도 하고, 공부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한가위 혹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가 되면,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고 가족이 꼭 피를 나눈 사람들의 모임만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9장에서 말하는 공동체, 즉 십자가 위에서 낳은 제자들의 공동체는 엄연히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공동체였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여인이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랑받던 제자에게는, “이 사람이 당신의 어머니이다.” 라고 하신다. 돌아가시는 순간 예수님은 왜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굳이 여인이라 하셨을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여성 제자들을 부르실 때, 부르시는 호칭이 여인이다. 즉 예수님이 만드시는 공동체는 제자들이 만드는 가족 같은 공동체인 것이다. 나는 오늘도 혈연을 넘어 예수님을 기억하는 초대 공동체의 성찬, 나는 그런 성찬 체를 사는 가족 공동체를 꿈꾼다. 한가위 혹은 추수감사절 같은 축제를 생각하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꼬마가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스티브다. 내가 씨애틀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임시 여성보호소에서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었다.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 첫날, 나의 강한 한국 악센트를 듣고 한 꼬마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너는 프랑스 사람이야?” 하고 물었다. 나는 “아니, 나는 한국 사람이야” 라고 하니 한국이 뭐냐고 물으며, 자기 이름은 스티브라고 했다. 그렇게 스티브는 내가 그 보호소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가 되었다. 그 아이는 보자기를 어깨에 두르고 자기가 슈퍼맨이라며 뛰어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 머무는 다른 아이들처럼 스티브도 화가 많았다. 차이가 있다면, 화가 날 때마다 그 아이는 “도와 줘요.” 하며 나를 따라왔다. 나는 베개를 주며 침대를 치게 했고, 아이는 무서운 힘으로 베개를 내려쳤다. 한참을 그러다 내가 “이젠 괜챦아?” 물으면, 아이는 주근깨투성이의 코를 찡긋거리며 “응, 고마워요.” 하고 다른 꼬마들에게로 돌아갔다. 이곳의 아이들은 분노와 서러움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아이들과 놀이터에 가서 뛰어 놀았다. 함께 소리치고, 뛰면서, 그들의 화가 좀 풀리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여성을 위한 임시 보호소(emergency shelter)이기 때문에, 4주에서 6주까지 밖에는 머물지 못한다. 스티브의 엄마는 약물 중독이 심하고, 더군다나 임신 중이었다. 스티브는 그런 엄마로 부터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자기한테 관심을 준다는 것을 알고, 그 아이는 내가 올 시간이 되면 꼭 보호소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다가, 내가 오면 달려와 함께 책을 읽자고 하거나 숙제를 함께 하자고 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다. 스티브 엄마가 고마왔다며 자기는 추수감사절을 지내고 오레곤에 있는 자기 엄마 집에 간다고 인사를 했다. 나도 잘 지내라고 인사를 하고 아이들에게로 갔는데, 스티브가 보였다. 나는 스티브에게 “추수감사절 지내러 할머니한테 간다며? 스티브는 좋겠네!” 하고 인사를 건네었다. 그러자 스티브는 무척 서운한 눈으로 “그러고 나면, 우리는 이제 여기를 떠나 또 다른 보호소로 가는 거야” 하고 말했다. 나는 순간 여기가 임시 보호소라는 것을 잊은 나의 무심함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갑자기 스티브는 “네가 그리울 거야.” 하고 나를 빤히 보았다. 쿵 마음이 아팠다. 추수감사절의 여행을 기점으로 그들은 이 임시보호소를 나가 또 어디인가를 헤맬 것이다. 아빠도 없이, 마약중독인 엄마를 의지해서 자라야 하는 이 꼬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스티브를 가까이 불렀다. 그날도 스티브는 슈퍼맨처럼 보자기를 질끈 어깨에 두르고 내게로 왔다. 나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티브, 우리 약속하자. 너도 꼭 좋은 사람이 되고, 나도 꼭 좋은 사람이 되는 거야. 그럼 우리는 같은 세상에 함께 있는 거야. 나도 나쁜 사람이 되면 너를 볼 수 없을 거고, 너도 나쁜 사람이 되면 나를 볼 수 없을 거야. 알았지?” 나는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스티브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음날 수업을 마치고 보호소에 갔을 때 스티브와 엄마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가을, 햇살이 점차 부드러워 지고 기억 속에 잠자던 추억이 되살아난다. 스티브는 벌써 자라 스무 살은 되었을 것이다. 약속대로 나는 스티브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건가? 그 아이는, 그리고 나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건가?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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