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인가, 초등학생 딸아이가 가정통신문을 들고 왔다. 자녀들을 일찍 등교시키지 말라는 통보였다. 학교 안에서 납치유인돼 성폭행을 당한 아동이 늘어나면서였다. 그후 서울시교육청에서 학교 보안관 제도를 마련해 그나마 안심이 됐는데, 최근 연이어 아동성폭력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동네 구석구석이 우범지대로 보이고, 나이 불문하고 ‘잠재적 위험분자’로 보여 딸의 안전을 골몰하게 만든다. 요즘은 딸을 키우는 부모에게 ‘난세’인 듯하다. | | | ▲ 김휘 감독 <이웃사람>, 2012년 | 최근에 개봉된 김휘 감독의 <이웃사람>이라는 영화를 나는 보지 않는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는 “죽은 소녀도, 살인마도, 그를 막는 사람들도 모두 ‘이웃사람’이다. 202호 소녀의 죽음, 그리고 열흘 간격으로 발생하는 연쇄살인사건, 범인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고, 강산맨션의 이웃사람들은 공포에 떤다”고 했다. 그 공포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 애써 ‘있는 현실’을 외면하려고 시도하는 것일까.
아동에 대한 성폭행의 경우 범인의 대부분이 이웃이거나 심지어 친인척들이라는데, 그렇다면 ‘안전한 이웃’은 없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오히려 경계해야 할 낱말이 된다. 그렇게 이웃은 우리 주변에서 실종되기 시작했다. 이 이웃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경찰이 나서기로 한 모양이다. 경찰청은 ‘무차별’ 범죄와 아동성폭행 등 강력 범죄를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불심검문’을 시작했다. 최근 성폭행 사건에서 늘 실수만 연발하던 경찰이 나서는 일이라서 도무지 미덥지 않다.경찰의 불심검문을 두고 인터넷상에는 “이게 불심검문으로 해결될 문제냐. 무차별 살인 및 폭행은 MB정권 5년간 중산층과 서민 모두 빈민화돼 버린 절망과 분노가 원인”이라는 말도 나오고, “성범죄와 성희롱 논란 등을 일으키며 성도덕을 망친 새누리당 정권이 원인”이라는 말도 나왔다. 결국 무차별 불심검문에 대한 인권 시비가 붙고, 경찰은 심야에 다세대주택이나 원룸 밀집지역 등 범죄 발생률이 높은 지역에서 집중적인 불심검문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제 서민 주거지역에서 야심한 밤에 다니는 이들은 ‘의심받을 만한’ 이웃이 된 셈이다. 그러니 나도 심야에 빌라 현관에서 서성거리며 담배 태우는 일은 삼가야 할 판이다.
언론과 경찰이 연일 이웃을 조심하라고 다그치는 요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 <에밀리>의 전언이 더 새롭게 다가온다. 이 동화책을 수년 전 무주 시골에 살면서 다섯살배기 첫딸을 무릎에 앉혀놓고 읽었다.
길 건너편에 ‘에밀리’라는 신비로운 여인이 살고 있었다. 아직은 추운 겨울, 언젠가 피아노를 치시는 어머니에게 그 여인에게서 전갈이 왔다. 평생 문밖출입을 하지 않아 신비에 싸였던 그 여인은 납작하게 말린 초롱꽃을 넣어 보낸 편지를 통해 어머니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저는 마치 이 꽃과 같답니다. 당신의 음악으로 저를 소생시켜 주세요. 그 음악이 저에게 봄을 가져다 줄 거예요.” | | | ▲ 마이클 베다드 글, 바바라 쿠니 그림의 그림동화 <에밀리>(비룡소)의 한 컷 |
다음날 어머니를 따라 그 집에 가면서, 소녀는 백합 알뿌리 두 개를 주머니에 넣어 갔다. 정작 그 여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떨리고, 음악이 어두운 방에 퍼져나가자, 이윽고 박수소리가 잔물결 치며 계단 위에서 밀려 내려왔다. 다시 연주가 시작되고, 소녀는 살금살금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그 계단 위에 온통 새하얀 그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장난꾸러기 꼬마야, 이리 오렴.”
소녀가 백합 알뿌리를 그분의 무릎에 내려놓았다. “땅에 심으면 백합꽃으로 변할 거예요.” “그럼 나도 너에게 뭔가를 줘야겠구나.” 그분은 종이 위를 가로지르며 시를 써서 소녀에게 선물로 쥐어주었다.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리기 때문이다.”
이웃이 실종되면 어디서도 ‘천사’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는 너무 순진한가, 묻는다. ‘이웃’이 빠진 ‘사랑’은 얼마나 공허한가, 묻는다. ‘도둑고양이’를 ‘길고양이’로 고쳐 부르며 환대하는 풍속을 바꾸어, 이웃을 ‘개’보다 조심하라고 이르는 게 부모의 도리일까. ‘이웃사랑’ 대신에 ‘이웃조심’이라고 경전의 문구를 바꾸어야 할까.
예수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듯이, 우리 이웃 안에도 있을 ‘천사’를 마다하는 세상은 외롭고 서늘할 것이다. 더구나 그 외로움이 다른 범죄의 가능성을 높이지 않을까, 걱정된다. “세상에 나를 알아줄 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이웃은 이웃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게 된다. 한번 미끄러진 삶에서 회복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출구 없는 삶은 다른 이웃들을 모두 지옥으로 보낸다. 지옥이라도 혼자 가기는 억울할 테니까. 그러니 세상의 가장 힘든 고비를 넘어가는 이들에게 백합 알뿌리 하나쯤 손에 건네주어야 한다. 또 아는가, 그게 꽃으로 피어날지.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 이 글은 <경향신문> 9월 7일자 '낮은 목소리' 실렸던 글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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