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남녘 사람들은 조금 누르스름한 잎의 ‘참동백’에서 작게 피어난 동백꽃을 귀하게 여긴다. (사진 제공 / 박세영) |
며칠 전, 시아버님께서 홀로 사시는 완도에 내려가는 길에 완도수목원에 들렀다. 입구부터 만개한 벚꽃과 자홍색 꽃 잔디가 화사한 봄기운을 전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국내 유일의 난대 수목원이라는 이곳의 주인공은 역시 동백이었다. 노란 수술을 품고 새빨간 꽃망울을 터트린 동백꽃이 수목원 전체를 붉게 물들여 그야말로 꽃 천지였다. 애욕을 넘어 천국으로 김소월은 어느 봄날 영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꽃을 보며 노래했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 걸음 /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고. 그러나 나는 완도의 산길에서 새빨간 동백꽃잎을 즈려밟으며 다시 김소월을 떠올렸다. 그가 혹시 이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미하는 남도의 동백꽃을 보았더라면 진달래꽃 대신 동백꽃을 가슴 아픈 이별의 매개체로 노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연하게 땅에 떨어져 밟히고 있는 새빨간 동백꽃잎을 보니,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지만 그래도 떠나는 임을 부여잡지 않고 보내주는 마음, 마음속의 눈물을 삼키면서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니 살포시 나를 즈려밟고 가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이 느껴졌다. 또, 이러한 마음에서 이성과의 사랑을 넘어선, 온 우주 만민을 위한 연민의 아픔까지도 찾아볼 수 있었다. 숲길에는 만개한 동백꽃들과, 짙붉은 색으로 바닥을 물들이고 있는 낙화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니 마치 이곳이, 이기적인 애욕을 넘어선 천국의 길인 것 마냥 행복했다. | | | 사진 제공 / 박세영 |
진심으로 함께하는 마음 연민이란 무엇일까? 영어로는 ‘동정, 동조’라는 뜻의 ‘sympathy’로, 한자로는 ‘불쌍히 여길’ 연(憐) 과 ‘근심할’ 민(愍)을 써서 ‘憐愍’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연민의 가장 기초적인 감정은 ‘감정이입, 공감’을 의미하는 ‘empathy’로 볼 수 있다(이승자, 바탈배움터 blog.naver.com/szlee608 참조). 즉, 이심전심(以心傳心)처럼 진심으로 함께하는 마음이 연민이 아닐까 한다. 그 마음에서 서로를 위해 더 좋은 내일을 함께할 행동이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공부하고 생활을 나누는 철학 강좌(앞 링크 참조)에서 한 자매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녀는 “이번 가을은 쇼펜하우어의 연민을 만나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다. 기온도 쌀쌀해지고 나뭇잎도 모두 떨어져 다시 한 번 삶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던 어느 가을날, 그녀가 만난 쇼펜하우어의 연민은 그녀에게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밝혀 주었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쇼펜하우어는 급속한 산업혁명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짓밟히며, 자본가들의 억압에 시달리는 상황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 그러면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뇌했던 그가 찾아낸 결론은 이것이었다. “그래. 내가 이렇게 이 사람들의 고통에 아파하며 잘 되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이 마음이 있는 것을 보니, 이것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한다(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참조). 올해 봄, 나 또한 2700년 전의 고대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상을 접하면서 ‘내가 세상을 위해, 작게는 내 주위의 이웃을 위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물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본 스승 탈레스와는 달리,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서 생명의 근원을 찾았다. 그런 그가 세상을 이해한 기본 틀은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고, 완전히 규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최초의 존재가 이 우주에 있으며, 그 존재를 우리말의 ‘온’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각 개별자들과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풀었다. 온은 거대한 분모가 되며 각 개별자들은 분자가 된다. 개별자들끼리는 대립과 소통을 통해 온과 같은 규모와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분자와 분모가 같아져서 1이 된다. 즉 온전한 하나가 된다는 개념이다(아낙시만드로스, <자연에 관하여(περί Φύσεως)>, 이승자, 앞 링크 참조). 나는 ‘온’을 그리스도교에서 신(神)으로 정의한 개념으로 이해했다. 분모인 전체와 분자인 개별자들이 소통하여 하나가 되면, 진화의 끝인 완전한 완성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므로. 온 우주 속에 하나의 개별자로서 나는 분모인 ‘온’과 일치하여 완전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다른 개별자들에게 무엇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그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그들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느낄 수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마음이 토대가 되어야 올바른 행동이 나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여는 열쇠 지난해 개봉해 천만 관객을 모았던 영화 <도둑들>의 주인공 중에는 예니콜(전지현 분)이 있다. 그녀가 발에 문신으로 새긴 “Happy ending is mine”이라는 문구가 기억에 남아 있다. 바로 앞날을 예측 못하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늘 “Happy ending is mine”이라는 희망과 자기암시를 갖고 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감동을 준 소설을 한 권 추천하라’면 언제나 서슴없이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를 든다. 이 책도 <도둑들>의 예니콜이 바라던 것처럼,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필립’이라는 주인공이 고뇌하고 겪어야 했던 삶의 숙제들은 결코 행복하거나 가볍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고아에다가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저는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필립은 10살 무렵 부모님을 잃고, 성공회 사제인 삼촌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삼촌은 그리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어서 그에게 따스한 가정을 마련해 주지 못했다. 학교에 가니 한쪽 다리가 짧다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속이 상해서 단식하며 아주 간절히 기도했다. “믿음으로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신 하느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자고 나면 저의 짧은 다리 한쪽이 긴 다리와 똑같이 되게 해주소서” 하고 절박하게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했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께 마음의 문도 닫아버렸다. 성장해서 의대생이 된 그는 너무나 순수하고 밝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부족해 보이는 자신 때문에 다가가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짧았던 다리도 수술해 치료하게 되었고, 그 여인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 사랑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나는 이 주인공이 행복할 수 있게 된 열쇠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연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귀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존재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자 삶은 바뀌기 시작했다. | | | 사진 제공 / 박세영 |
너와 나를 살리는 한방울의 눈물 안양에 사시는 혜종 스님의 강의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살레시오 수녀회가 운영하는 광주 살레시오여고를 다녔는데,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종교 시간 수녀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남아 있다고 하셨다. 어느 날, 성모님을 묵상하며 갑자기 ‘성모님은 정말 모든 생명을 품어 안아 일으켜 세워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시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눈물이 났다고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마음 선원의 대행 스님께서도 이러한 눈물을 두고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더라도 이렇게 자신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눈물을 흘려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자신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연민의 마음,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이 아닐까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유교에서는 인(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이승자, 앞 링크 참조). 남녘 수목원에서 동백꽃잎으로 덮인 길을 걸으며 나는 천국을 보았다. 자신을 상대에게 맞춰 이해하고 진심 어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연민의 희생과 기쁨을 보았기 때문이다. 크게는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로마 12,15)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이 세상이 이러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면 나는 또다시 천국으로 가는 꽃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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