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낮의 타오르는 태양에도 불구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어김없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열기 때문에 ‘어서 빨리 9월이 왔으면’ 하고 기다리기도 하지만, 그 열기로 오곡백과가 튼실하게 익어갈 것을 생각하면 8월을 보내기가 조금 아쉽다. 내가 이 세상과 처음으로 만난 달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초등학생처럼 아직도 8월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의 중심에는 고인이 되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다.
물과 기름처럼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지” 하는 낙천적 성격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분이셨다. 초등학교 5학년 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기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는 없었지만 늘 쾌활하고 성실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도 무척 성실한 분이셨지만 아버지보다 걱정이 훨씬 많으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뛰어나게 공부 잘하는 오라버니와 남동생도 있었건만 어머니는 늘 걱정을 달고 사셨다.
이제 나도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춘기였고, 철도 없어서 어머니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마음을 비우고 세상 욕심을 내지 않으면 더 기쁘게 사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어머니는 여고 시절 의대 진학을 꿈꿀 정도로 공부를 잘하였고, 책도 무척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그러나 집안에서 ‘여자라고 대학 진학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꿈을 이룰 수 없었다’는 서운함도 간직하고 계셨다. 그러기에 시험기간이라도 12시만 되면 맘 편하게 잠들고, 뜨개질하고 친구 만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딸’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셨다.
▲ 경상북도 성주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던 길에 딸 소은이
이해하면 풀리는 원망
고2 겨울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던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 가셨다. 수술 후 침대에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보자, 어머니에 대한 모든 철없던 원망이 한순간에 녹아버렸다. 힘없이 침대에 누워계시는 어머니에게 순수한 연민의 마음을 가지게 된 듯하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17년 동안 혼자 걷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 되셨고, 아직 커 나가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것을 마음 아파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그래도 어머니가 곁에 계시는 것이 좋았고, 힘들 때도 많았지만 한결같은 마음이고자 노력했다.
어머니가 신앙심이 약하신 게 아닌가 하고 내심 비판했던 딸은 이제 그때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딸은 일요일이면 맘 편하게 늦잠을 자지만, 어머니는 일요일도 일하러 나가셔야 했음에도, 빠지지 않고 새벽 미사에 먼저 다녀오신 후 일을 나가셨다. ‘귀찮고 부담스럽다’고, 고백성사 보기를 자꾸 미루는 지금의 나와 달리, 너무도 겸손한 얼굴로 참회하시며 자주 성사를 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엇보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는 아픔을 견디며, 17년의 투병생활을 기도로 이겨내신 점이 존경스럽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키듯이
멋있고 잘난 나무는 일찍 베어져 산을 떠난다고 한다. 그래서 못난 나무들이 남아 울창한 산을 이루며 지켜간다. “그리스도께서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다”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처럼(1코린 15,8 참조), 나도 형제들 중에서도 그리 내세울 게 없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어쩌면 형제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이어가고 있는 것 같다. 소박한 가족 성지순례 책도 엮었고 대학 졸업 후 첫 직장부터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쁜 그릇이나 비싼 패물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아버지 몰래 주문하고 눈치를 보시던 어머니! <플란더즈의 개>를 읽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너무 슬프다”고 눈물 흘리시던 순수한 모습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깨닫지 못하고 부인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은 이렇게 나의 유전자와 무의식에 살아남아서, 지금 여기 행복한 내 삶의 든든한 뿌리가 되고 있다.
<지금여기>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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