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시원하게 내려 보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서니 생각보다 아담한 장소가 정겹게 다가온다. 물고기 자리인 큰아이가 물고기가 새겨진 커다란 돌이 반갑다고 묘지 밑 쪽으로 달려가자 동생들이 우르르 따라 간다. 이 성직자 묘지에는 1890년 이래로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뮈텔주교, 최민순 신부님의 묘소를 비롯하여 주교 묘지 4기, 신부 묘지 67기, 신학생 묘지 2기, 치명자 묘지 1기 등 모두 74기가 모셔져 있다.
처음 이곳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신학교 4학년 늦가을 때다. 철친한 친구와 학교를 졸업하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이야기하며 도서관 옆 벤치에 하염없이 앉아 있을 때였다. 검은 색 겉옷으로 감싸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동갑내기 한 신학생이 우리를 보고 스산해진 바람과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뭐 하냐고’물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던 우리는 ‘어디 갔다 오는지?’ 물어보았다. 11월 2일 위령의 날을 맞아 용산 성직자 묘지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운동장 저쪽으로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나는 ‘와, 신학생은 역시 다르구나… 현실의 기쁨을 즐기는 대신 신앙에 헌신하다 돌아가신 신부님들을 잊지 않고 참배 하고 오다니….’하고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는 꼭 그곳에 가보아야 겠구나 하고…. 그 소망을 15년이 지난 오늘에야 아이들 셋을 데리고 와서 이룬다.
조선교회 신자들은 1825년 유진길과 정하상이 사신행차에 동행하여 북경에 가 북경교회에 ‘조선교회의 암브로시오와 그 동료들’의 이름으로 교황께 직접 성직자 파견을 청원하는 두번 째 서한을 제출했다. 이는 훗날 교황그레고리오 16세가 되는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전해졌고 그는 이 가엾은 교회를 돌볼 선교회를 찾게 되고, 파리외방 전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이때에 브뤼기에르 신부님은 목자를 찾는 양떼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선하신 목자의 길을 자청했던 분이다. 이에 힘입어 교황청에서는 한국교회의 독자적인 관구 설정을 결정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으로 들어 오고자 3년 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은 못 들어오고 만주에서 선종하셨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있게 한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땅과 조선교회에 대한 사랑에 감동했는데, 2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분의 묘지 앞에 서니 마치 혈육의 묘소를 찾은 느낌처럼 감회가 새롭다.
그는 1828년 10월 파리외방전교회 전교회 연보에 보낸 글에서 조선 교회에 대한 관심과 전교열정을 표현하였고 1829년 파리신학교 장상들과 각지의 회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는 자신이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겠다는 의사를 열정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다음은 1828년 10월 전교회 연보에 실린 글로서 조선 교회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조선으로 보냈던 주문모 신부님이 순교한 이래로, 조선 왕국의 교우들은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열성적인 신입교우들의 사절이 해마다 북경의 주교를 찾아와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까지도 북경의 주교는 조선인 교우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최근에도 같은 내용으로 로마교황청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들보다 일본인들을 더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처럼 활발하고 영적이며 호기심도 강합니다. 그리고 일단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 확고한 신앙심을 가지게 됩니다…그런데도 어째서 유럽전체에 이 불운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제가 아직 한 명도 없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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