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성지(양화진묘역)
조선시대 한강을 건너던 양화(揚花)나루터 옆에 있었던 명승지로, 그 풍경이 뛰어나서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고 중국 사신들이 오면 빼놓지 않고 다녀갔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서울에서 강화도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으며 병선(조선시대 소형 전투선)의 훈련장이고 처형, 제사, 진휼(흉년에 곡식을 대여함)을 하던 곳이다. 대원군은 병인양요로 인한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과 그 원인이 천주교신자들이 프랑스 함대에게 도움을 줌에 있다고 생각한 대원군이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양화진 나룻터에서 처형을 집행했다. 이때 순교한 분은 이름없는 수많은 순교자와 성당 지하실의 성해실에 모셔진 27인의 성인이 있다.
순교자 기념관
본 기념관은 병인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6년 3월에 착공하여 1967년 10월 낙성되었다. 기념관은 건물 3층(총 325평)과 종탑(35평), 성당(99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박해 당시의 선조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유물과 자료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의 설계는 산의 모양을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순교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면서 한국적인 토착성과 전통적인 고유미를 살리는 데 역점을 두어 설계되었다. 궁궐의 기둥과 같은 화랑의 원주, 옛 초가집 지붕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미끄러져 내린 추녀, 조상들이 쓰던 갓 모양을 하고 있는 성당의 천개, 이런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옛 정취와 포근한 정감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성당의 평면은 부채살형으로써 초점인 제단에서의 성찬과 말씀이 반사되어 바깥 세계로 퍼져 나가 모든 인간에게 전해지는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
미리 알아두세요~
주소 :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96-1(02-3142-4434)
교통편 :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7번 출구에서 한강쪽으로 도보 10분 소요
순례포인트 : 절두산 성당 참례, 기념관 참례, 야외정원 순례
아이들은 한여름의 무더위와 빡빡한 일정으로 힘들어 했다.‘이러다가는 우리들도 순교하겠다’는 큰 아이의 엄살에 미안함 마음이 몰려온다. ‘우리는 여행 다니는 게 아니라 이 더위 속에서 우리마음을 봉헌하는 성지순례를 다니는 거’라고 아이들 아빠가 아이들을 달랜다.
그러나 결국, 집에 가면 피자도 시켜주고 컴퓨터 게임도 한 시간 허락한다는 타협을 한다. 그제야 쓰러져 있던 바위에서 일어나 성지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약 5년 전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촌누나와 우리가족은 개나리가 예쁘게 피던 봄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담하고 예쁜 성당에서 미사도 드리고 넓은 잔디 마당에서 모처럼의 휴식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약 20년 전에 성당 선배님께서 이곳 절두산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셔서 처음으로 와 보았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름없는 순교자들과 성인들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이 거룩한 땅을 결혼장소로 택하신 믿음이 대단하다. 이곳은 원래 한강으로 돌출한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의 머리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해서 잠두봉(蠶頭峰)•용두봉(龍頭峰)•가을두(加乙頭)라고도 불렀으나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신자들의 목이 잘리어 숨진 뒤 절두산(切頭山:머리가 잘림)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작은 돌 위에 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물을 내려다보니, 150 여 년 전 병인박해 때 무서웠던 참수의 광경이 떠오르며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선조들의 고난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기록에 의하면 절두산의 첫 순교자는 이의송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1866년 9월 15일 이의송과 부인 김이쁜 마리아, 아들 이붕익 베드로가 함께 참수 되었고, 김한여 베드로 와 최수 베드로 등 1867년 까지 24분이 참수 되었다. 보통 조선의 국법에 아버지와 아들은 한날에 죽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고 하나 여기서는 그것조차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1868년 독일인 오베르트에 의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원군의 묘가 파헤쳐지는 사건을 겪고 난 후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서양세력에 대한 적개심을 한층 강하게 드러낸다. 그래서“먼저 자르고 본다”라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생각으로 신앙인들은 재판의 격식이나 절차도 없이 머리가 베어지고 그 머리가 그대로 강물에 쌓이고 쌓여서 절두산이라는 지명이 되었다고 하니 그 무명의 순교자들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가 없고 대략 천명이 될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성모상에 인사하고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 아래 설명을 읽은 뒤 잘 가꾸어진 성지마당을 신나게 뛰어 다닌다. 아이들이 지금은 아직 어려서 깊이 있는 순례를 못하지만, 언젠가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생기면 어린시절 부모님과 형제 자매와 함께 했던 성지 순례를 기억하고 이 순교자의 믿음에서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는 힘을 갖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순례를 계속한다. 좀더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름답게 단장된 십자가의 길에서 기도도 바치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기약하며 전통미가 느껴지는 기념관 건물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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