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인파와 업무로 넘쳐나는 명동의 한복판에, 세상을 위한 진리의 메시지를 증거하며 서있는 명동성당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나 또한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가족 모두와 함께 순례의 지향을 가지고 방문하니 그 의미가 남달랐다. 한여름 낮 1시에 내려 쬐는 햇살이 따가워 온 가족 모두, 순례에 앞서 선크림도 바르고, 화장실도 다녀오고서야 성당을 향해 출발한다. 뜨거웠던 태양이 언덕 위 성당마당에 올라오니 한결 시원해진다. 오늘은 순례의 지향으로 방문했기에 대성당보다 지하성당으로 먼저 향한다. 담쟁이가 싱싱하게 얽혀있는 사제관의 전경이 아늑하다.
이제는 한국 가톨릭신앙을 대표하는 건물이 되었지만 200 여 년 전 이곳은 유명한 역관집안 출신인 김범우 선조의 집이었다.
천진암 주어사의 강학모임 등을 통해, 서학에 관심을 가지던 실학자들 사이에서 이승훈 선조가 북경성당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옴으로서 한국천주교회는 첫신자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가 이벽과 권철신,일신 형제 그리고 정약종, 약종, 약용의 형제들에게 대세를 베품으로서 신자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로서 남산골 명례방에 위치한 김범우의 집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신앙모임을 가지고 세례식을 거행하거나 교리강습을 하였다. 중인 출신이었던 김범우를 통해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최인길, 최필공 등의 같은 중인들이 입교하였다. 최초의 한국교회 순교자로 기록되고 있는 윤지충 등의 양반들도 그의 집을 출입하면서, 비치되어 있던 <천주실의>, <칠극>등을 읽고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신분질서의 한계 속에 있던 김범우와 같은 중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천주교가 자신들의 신분적 한계를 관념적으로나마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그래서 천주교에 더욱 다가설 수 있었다. 중인 층을 촉매로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정기적인 모임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을사년(1785년) 봄, 술마시고 노름하는 모임으로 오해한 형조의 관리가 그의 집에 들이닥쳐 양반들과 김범우가 형조에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을사 추조 적발 사건). 그는 그의 집을 장소로 제공했고 중인 출신이었기에 갖은 형벌을 받은 후 충청도 단양 또는 경상남도 밀양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유배 후 형벌의 여독으로 곧 사망했다고 전해지는데 그시기도 일정치 않다. 하지만 초기 한국 교회에서 그가 끼친 공로는 지대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죽음으로 이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선조의 집 자리가 한국교회의 심장부가 되어 수 많은 사람들의 공경을 받고 있으니 하늘에서도 그 흐믓함이 클 것이라 추측해 본다.
남동생도 2005년 1월 첫째 주에 이곳 명동성당에서 결혼 했는데 지하성전 앞 성모상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었었다. 첫아이 ‘다윗’을 잃고 애태우다가 지금은 미국에서 세쌍둥이를 낳고 잘 살고 있으니 하느님 섭리의 오묘하심을 느낀다. 모두 함께 내려간 지하성전에는 기도하시는 분이 몇 분 계셨고 우리들은 소란스럽지 않게 자리를 잡고 성인들의 유해를 바라보며 기도 드렸다. 당신들의 삶이 있었기에 우리 한국교회가 이만큼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말씀드린다. 성인들은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신앙의 증거로 길이 이곳에 남아 우리들의 약한 믿음을 좀더 굳세게 북독우고 계심을 느낀다. 이곳의 성인분들 중에는 우리 어린이들과도 삼성산성지를 통해 안면이 있는 앵베르 주교님, 모방, 샤스탕 신부님 등도 계셨다.
지하성당을 나와 대성전에도 들어 갔다. 아름다운 제대가 우리를 맞아준다. 양쪽에서 제대를 호위하고 있는 천사들의 생생한 모습, 거룩한 12사도의 모습들이 경건함을 더해준다. 큰아이가 천사의 모습을 흥미 있게 바라본다. 첫영성체 교리를 받으면서도 수호천사가 있다는 말에 큰 위안을 받던 아이였다. 늘 하느님의 보호의 손길이 천사를 통해 함께하길 기원해 본다. 아이들은 장난치며 성당 계단을 밝게 달려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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