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남터는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도 했다. 지금은 새남터 성당에서 150m~200m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곳은 조선 초부터 군인들의 연무장(鍊武場)으로 사용되던 곳인데, 후에는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등의 사육신을 처형하였으며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과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하여 천주교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순교하신 치명터이다. 1956년 천주교순교자기념탑이 세워졌고, 1983년 한국 순교 복자 성직수도회에 의해 지하 1층, 지상 3층, 종탑 3층으로 된 순 한국식 건물의 기념성당이 세워졌다. 그리고 지하 새남터 기념관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직자들의 흉상과 부조가 있다. |
미리 알아두세요~
주소 : 서울시 용산구 이촌2동 199-1(02-716-1791)
교통편 : 하철 1호선 용산역, 4호선 신용산역 4번 출구에서 걸어서 15분(마을버스 있음)
순례포인트 : 새남터 성당 참례, 지하기념관 순례
아파트와 빌딩, 철길…. 작은 것보다 큰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서울의 한 복판에 위치한 새남터 성지. 200여년 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한강변 모래 사장에서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현세의 안락보다 영원한 기쁨을 선택했다. 망나니들의 춤과 핏빛 공포가 서린 새남터 모래밭을 묵상하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길은 더 분명해진다. 현세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영원을 향한 믿음을 갖고 살면,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 속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고, 네온 불빛 속에서도 순수하게 빛나는 별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아파트 단지를 돌아서 들어간 성직자들의 순교터 근처에 새남터순교 기념성당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성전 바깥 벽에는 주문모 주교를 비롯하여 샤스탕, 엥베르, 모방 신부님의 초상이 순례자를 반긴다.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들 중 대부분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판결 받아 참수형보다도 더 극한 형벌인 군문효수(軍門梟首) 형을 받고 순교하셨다. 군문효수란 민중들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당시 군대규율에 따라 목을 베어 군문(軍門)에 매달던 형벌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첫 선교사였던 주문모 신부님이 1801년 군문효수 된 것을 비롯하여,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조선 제2대 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쓰탕 신부가 군문효수되고 1846년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님인 김대건 신부님이 1866년에는 제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프티니콜라∙푸르티에 신부 등이 군문효수로 순교하셨다. 또한 평신도 지도자인 현석문 가를로,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이 군문효수로 순교하셨다. 또한 벤 목은 장대에 높이 매달아 다른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하니 이런 모습까지 견디는 순교의 의미는 더욱 크다 하겠다.
이곳에서 목자로서는 처음으로 순교하신 주문모 신부님은 1794년 초 교구장인 북경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성무집행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 받고 북경을 떠나 만주에서 사목활동을 하며 조선입국을 위해 기다리다가 1795년 1월 14일경 서울에 도착하였다. 곧바로 성무수행을 위해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1795년에는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미사성제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입국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아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될 뻔 했으나 주신부님을 모시고 온 윤유일, 최인길, 지황 등이 신부님을 대신하여 순교하였고, 양반인 부녀자의 집은 함부로 검색할 수 없는 법을 이용하여 여회장인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박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중국이 선교의 자유를 허락했던 방법처럼 서양의 큰배에 마태오 리치 같은 높은 학식을 가진 선교사가 많은 선물을 싣고 와서 조정에 요청해 주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전라도 교회의 중심인 유항검에게 직접 북경주교에게 편지를 쓰기를 부탁하고 5차례나 전달하였으나 그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주신부님은 제한된 환경속에서도 낮에는 신심서적을 저술하여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밤에는 성무활동을 하며 입국시 4천명이던 신자들을 만여명으로 늘렸다. 또한 평신도 사도직 활동 단체인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박해시기를 이겨나가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801년 박해가 시작되자 박해자들의 분노를 자신이 모두 받아 신자들에게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여주고자 3월12일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그는 모진 문초중에서도 “내가 조선에 온 것은 한 가지 목적뿐이오. 참된 종교를 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불쌍한 백성의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었소”라고 대답하였으며 처형 직전에도 힘차게 “나는 천주교를 위하여 죽습니다”하고 외쳤다고 한다. 마흔 아홉의 나이에 순교하셨으며 순교하시자 마자 영롱한 무지개가 하늘에 걸렸으며 군인들의 삼엄한 감시대문에 시신을 찾지는 못하였지만 3일 동안 처형장에 방치된 시신 위에 매일 밤 찬란한 빛이 나타났다고 한다.
기념관 담당자가 친절하게 아이들에게 이것 저것을 설명해 주셨다. 아이들은 인형으로 만든 교우촌 모습을 제일 재미있어 하였다. 끌려가는 선조들, 처형하는 망나니들의 모습을 보니 그때의 상황이 좀더 생생하게 그려진다. 김대건 신부님이 직접 쓴 편지를 보면서 수려한 문체에 감탄했고 선조들이 신앙을 강화하고 전교하기 위해 돌려보았던 여러 신앙서적들도 전시되어 있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셨던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시청각실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에 대한 영화가 시작되었다. 고문 받고 칼날에 목이 베이는 광경이 많이 나오자 막내와 둘째가 무섭다고 한다. 큰아이는 집중해서 열심히 보았다. 성인들의 유해 앞에서 둘째와 막내랑 화살기도를 드리고 대성전으로 올라갔다. 103위 성인들의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과연 천상의 영광을 누릴 실 만한 분들이다. 막내가 1층에 전시된 모형들로 만든 처형장면을 무서워하지 않고 열심히 바라본다. 모래밭에 떨어져 있는 순교자들의 목 모형들을 신기해하며 한참 동안 쳐다본다. 기념관에서 나온 큰아이는 우리에게 한마디로 “잔인랜드”였다고 한다. ‘우리도 박해시절에 태어나 신앙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라는 질문에 겁 많고 모범생인 애니어그램 6번 유형의 큰아이가 ‘안 들키도록 몰래 숨어서 기도할 거’라고 답한다. 그래도 안 믿겠다는 애기를 하지 않으니 어느덧 주님의 성령이 아이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일까? 조선 교회의 첫 사목자였던 주문모 신부님의 흉상이 시대를 뛰어넘어 목자의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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