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7(9)
광주주어사 및 천진암에서 강학모임
성호 이익의 제자들인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김원승, 권상학, 이총억,이벽 등이 한역서학서 등을 통해 선진유학의 ’천’과 천주교의 ‘천주(天主)를 연결시켜 보유론적으로 이해하고 천주교에 더욱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1784년 2월
이승훈이 북경의 북당(성당)에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최초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됨
귀국과 함께 서양의 각종기기와 천주교 서적, 십자가상, 성화, 묵주 등을 가지고 와 이벽에게 빌려주며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784년 겨울
서울 수포교(중구청계천2가)에서 이벽, 정약종, 권일신 등 약 10명이 이승훈부터 ‘대세’ 받음
조선최초의 ‘자발적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존창, 유항검, 윤유일,홍낙민, 윤지충 등이 신앙을 받아들임
1785년 가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서울 남산골 명례방 신앙모임중단
이벽 선조 병사(死)(혹은 1886년 봄)
중인출신 김범우의 집(명례방모임)에서 세례식 및 교리강습이 행해짐,김범우는 이 때문에 고문을 받고 유배 후 사망.
1786년 가을
가성직제도 실시(이승훈의 주도로 북경교회와 유사한 10명의 사제단 구성 및 성사집행)
정확한 교회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늘어나는 신자들과 신앙생활의 유지를 위해 실행, 1-2년 후 중대한 잘못임을 알고 중지함
1789년 10월~1790년 봄
윤유일 1차 북경 방문
이승훈이 작성한 ‘가성직제도 및 신자생활 중 의심스러웠던 부분’에 대한 질문을 담은 편지를 가지고가 로신부에게 문의하고 구베아 주교로부터 사목교서를 받아 옴
1790년 9월
윤유일 2차 북경방문
조선교회에 신부파견을 요청 및 조상제사 금지에 대한 구베아 주교의 명령과 서한 받아옴
1791년 12월 7일
신해박해 또는 진산사건으로 윤지충과 권상연 참수형, 최초 순교자들이 됨
한국천주교회의 첫 순교자.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하여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형 당함.
1794년 1월 23일
지황과 박요한 북경 방문, 선교사 요청
구베아주교가 중국인 주문모 신부 선발
1795년 1월 4일경
주문모 신부, 서울 도착
조선교회에 첫 사제부임
1795년 6월 28일
윤유일, 최인길, 지황의 순교
주문모 신부님의 행방에 대해 함구하면서 포도청에서 매맞고 순교
1795년 1월 4일경~1801년 4월 19일
주문모 신부의 사목기간
성사집행 및 교세 확장의 시기, 평신도들의 회장제 도입과 한글교리서 보급에 노력(최창현의 ‘성경직해’ 번역 및 정약종의 ‘주교요지’ 저술)
1798년 ~ 1799년
청주에서 핵심신자 처형 및 해미에서 100여명 처벌
충청도 내포지방(청주포함) 지역박해
1801년2월14일~1801년 12월30
‘’신유박해’’
2월26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홍교만, 홍낙인, 이승훈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
4월19일 주문모신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
5월22일 강완숙, 문영인, 홍필주 등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
9월17일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은 능지처사
11월5일 황사영이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
신유년에 일어난 박해로 처형된 자는 100명, 유배된 자 400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노론벽파의 대왕대비 김씨는 실학과 서양과학기술로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해 주었던 남인계열 성호학파 중 일부가 수용한 천주교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의도로 일으켰다. 또한 당시의 지배사상이던 주자학의 입장에서는 만물의 근원으로 보는 태극을 부정하고 인격적인 하느님과 내세를 강조하며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기하는 천주교교리가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천주교회 주요 창립멤버와 한 분뿐이던 신부님, 그리고 남여 평신도 회장, 전라도 지역 핵심신자 및 급진적 호교론자인 황사영까지 순교하게 됨으로써 신앙공동체는 큰 시련을 맞는다.
1805년 ~ 1811년
교회 재건운동 시작(신태보, 이여진, 권기인, 홍우송 등)
각지로 흩어져 있던 교우들이 연락을 취하며 공동체를 좀 더 체계적으로 조직함.
1812년 초
1811년 작성한 신미년 서한을 이여진이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전달
조선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교황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목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서한1통과 북경의 주교에게 쓴 서한 1통을 전달함
1815년
을해박해
대구와 원주지역의 신자들이 탄압받고 대구와 경주의 감영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 탄생
1816년 말
정하상 바오로가 북경교구의 리베이로 누네스 신부에게 선교사 파견요청
1816년~1835년까지 16차례 북경을 방문하며 성직자 파견을 요청함
1825년
유진길은 ‘로마의 교황께 직접 성직자 파견을 청원하는 서한’을 북경교회에 제출
마카오 포교성성 책임자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전달되고 로마의 포교성성 장관이며 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 도착하여 조선 대목구 설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
1827년 2월~5월
정해박해
전라도 곡성에서 시작되어 전라도 전 지역, 경상도 상주, 충청도 단양까지 번진 박해(신태보, 안군심, 이경언이 투옥되었고 10년 넘는 긴 옥살이 후 기해박해 때 순교)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 대목구 설정 소칙서’및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제1대 ‘조선 대목구장 임명 소칙서’를 반포함
조선 대목구 설립의 실질적인 유효성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이 성사된 후에야 발휘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었다. 1935년 10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서 선종하고, 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되었던 모방신부가 1836년 1월 15일 서양인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에 부임한다.
1836년 연말
모방신부에 의한 최초의 조선인 신학생 선발 및 유학 (최양업,최방제,김대건)
1837년 6월 7일 마카오 도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내의 신학교에서 교육받기 시작.
1837년 1월 15일
샤스탕 신부 입국
신자촌 회장제 활성화 및 성사집행여행으로 선교지역 확대 및 신자수 증가
1838년
앵베르 주교 입국
앵베르 주교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특전에 근거하여 모범적인 성인신자에게 속성신학교육으로 서품을 주려고 계획했으나 기해박해로 중단(정하상 외 3명). 세 신부님의 선교활동으로 급격한 신자수의 증가(1838년 말, 신자 수 9,000여명으로 추정)
1839년 3월~1840년 말
“기해박해”
1939년 9월 21일, 앵베르, 모방, 샤스탕신부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1839년 9월 22일, 정하상, 유진길,남이관, 조신철, 김제준 등 교회 핵심 인물 서소문 밖에서 참수
헌종 5년, 천주교에 적대적이던 벽파 풍양조씨 일파가 우의정 이지연과 함께 천주교에 온건적이던 시파 안동김씨로부터 정권을 탈취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다.
정하상은 정약종의 아들로 순교를 결심한 뒤 박해자들에게 제출할 호교론인 ‘상재상서’를 직접 작성함.
앵베르 주교의 지휘 아래 정하상 현경련, 현석문, 최영수, 이재의 등은78명의 기해박해 순교자를 기록하였다. 1847년에 완성된 이 ‘기해일기’는, 한글로 쓰여져 신자들의 신심을 북돋우고 추후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서품 받음
조선천주교회의 첫 방인 사제 탄생
1845년 10월 12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님 ‘라파엘 호’를 타고 충청도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
해로를 통한 제 3대 주교님 및 선교사 첫 입국. 성사집행을 통한 선교의 활성화 및 신자들의 신심강화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님 체포, 병오박해 시작
김대건 신부님과 관련된 인물 체포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만25세)
9월19일 현석문 군문효수, 9월20일 임치백,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 등도 순교
1846년 11월 2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님이 충남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 성심회’설립
1866년 병인박해 전까지 조선 교회의 신자들이 특별히 성모님의 도움을 간구했던 신심단체로 프랑스 파리의 ‘승리의 성모’성당 데쥬네트 신부가1836년에 설립했다.
1849년 4월 15일
최양업부제가 남경 교구장 서리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음
조선천주교회의 두 번 째 방인 사제 탄생
1849년 12월
최양업 신부님이 봉황성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 성공
유학간지 13년 만의 귀국. 충북 진천의 동골 교우촌을 거점으로 전국의 공소들을 사목순방함
1854년경~
메스트로 신부에 의해 ‘영해회’ 사업 시작
죽음직전의 어린이들에게 대세(代洗)를 주고 버려진 아이들을 신자가정에 맡겨 양육하는 사업
1854년 3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님이 페낭 신학교로 이만돌(바올리노),김요한,임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 유학 보냄
사제서품을 위한 제2차 유학생 파견
1855년 1월
배론에 성요셉 신학교 개설
메스트로 신부에 의해 개설, 1866년 박해 후 폐쇄
1856년 3월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 입국
베르뇌주교는 3월25일 다블뤼 신부님을 부주교로 임명하고 서품식 거행
1857년 3월 26일
조선교회 최초의 시노드 개최
최초의 공식사목 지침서인 <장주교윤시제우서>반포 및 교리문답서인‘삼본문답(三本問答)과 아침, 저녁기도 강조함.
1857년 9월 24일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82위가 가경자(可敬者)로 선포
가경자란 교황청에서 시복 전 단계에서 복자 후보자들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지던 경칭, 가히 공경할 만하다는 뜻이다.
1858년 3~4월
최양업 신부님과 페롱 신부님은 제주도 사람 김기량을 만나 최양업 신부님이 성사를 베풀고 신앙전파를 당부
김기량이 제주도에 복음전파(1860년 집안식구 20여명 입교)
1859년~1864년경
조선교회 공식 교리서인 <천주성교공과>와 <성교요리문답>의 변역 및 편찬작업 완성,
최양업 신부님은 천주가사 여러 편을 지음(선종가, 삼심판가, 공심판가, 사향가)
최양업 신부님, 다블뤼 주교님 공동 작업
1861년
서울에 목판 인쇄소 설립
베르뇌 주교가 한글로 된 교회서적의 보급을 위해 설립함
1861년 6월 15일
과로와 장티푸스로 최양업 신부님 선종
그 해 11월 배론 신학교 뒷산에 시신을 안장
1861년 10월
조선 전 지역을 8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선교사들의 사목구역 정해줌
1861년 4월, 랑드르 신부, 조안노 신부, 리텔 신부, 칼레 신부의 서울 도착으로 10명의 신부가 있게 됨
1864년~ 1866년 1월31일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통상요구로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베르뇌 주교와 의견을 교환함
조선의 지도급 신자들인 홍봉주, 남종삼 등은 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의 만남을 주선했으나 이루지 못함
1865년
조선교회 신자 수는 23,000명 정도이며 공소는 185개 이상으로 확대 됨
기록상 충청도가 신자의 50%를 차지하고 서울,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 순이다.
1866년 2월19일~1873년 12월 24일
“병인박해”
1866년 3월 7일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새남터에서 순교, 같은 날 남종삼과 홍봉주는 서소문에서 참수
1866년 3월 9일 최형과 전장운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
1866년 3월 11일 정의배, 우세영,프르티에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새남터에서 처형
1866년 3월 30일 다블뤼주교, 위앵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장주기 등이 보령의 갈매못에서 처형
1866년 9월15일~ 1867년 8월2일 양화진에서 신자 처형(기록상24명)
1868년 5월 11일 이후 남연군(南延君)의 묘 도굴사건으로 전국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
1871년 미국함대가 조선을 침공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미국 군함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고 순교함
대원군의 섭정 속에서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목숨을 잃었고 지도급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에 항의하려고 시작한 프랑스군의 1차 2차 원정으로 인한 보복조치로 양화진에서 신자들 처형
1868년 5월11일 독일인 오페프트에 의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파헤치는 사건이 일어나 배후세력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지목하고 처형함
1873년 12월 24일
고종이 직접 정치를 담당하는 친정체제가 이루어짐으로써 병인박해는 끝을 맺음
1866년부터 시작된 이 박해로 전국에서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1882년
신앙의 잠재적 수용
명동성당 건립과 지역 본당건립 및 사회복지시설 건립
1886년
한불수호 통상조약
선교사들의 활도의 자유 보장
1895년
대규모 사면령(1866년에 순교한 양반들의 복권도 이루어 짐)
신앙의 자유가 공인됨
고종은 조선 교구장 뮈텔(한국 이름은 閔德孝, 1854~1933) 주교에게 병인박해 이래 많은 천주교인들이 희생된 일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면서, 앞으로 교회와 국가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것을 제의했다.
1899년
뮈텔 주교와 내부(內部) 지방국 사이에 교민조약(敎民條約) 체결
천주교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법률적으로 보장
1904년
프랑스 공사와 외부 대신 사이에 선교조약 체결
교민조약의 내용을 더욱 보강함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0) | 2010.09.18 |
---|---|
강학회 인맥도와 초기 순교자 가계도 (0) | 2010.08.31 |
2010 도쿄 도서전 참관기, 오늘에 충실하면서 미래를 준비한다 (0) | 2010.07.18 |
나리타공항에서 도쿄역으로 이동할 때 열차선택 (0) | 2010.07.16 |
2010 도쿄도서전 참가_진보쵸 서점가 방문 (0) | 2010.07.15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