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8. 2년 전에 다녀왔던 익산 여행기를 2021.02.26에 올리다.
고3 큰아이가 요근래 무척 힘들어했다. 겨울방학 동안 학원에 다니느라 긴장한 탓이었나 보다. 나도 오랜동안 끝내지 못했던 일을 마무리 하느라 많이 지쳐 있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에 모든 일을 뒤로 하고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 표를 끊었다.
수원역에서 익산역까지 가는 표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익산역을 바로 앞두고 함열역에서 내렸다.
특별한 기대도 없이 무엇인가는 있겠지, 하고 내렸다. 호남선 열차를 탈 때마다 함열이라는 지명을 여러 번 들어봤기에 이름은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기대 없이 내렸기에 마음도 더 편했다. 수원역 9시 41분 출발 함열역 12시 18분 도착.
열차 내부가 한산했다. 호남선으로 가다가 광주송정에서 경전선을 따라 순천으로 가는 열차였다. 연륜이 쌓인 한 승무원과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눴다. 안내 방송이 무척 정감이 넘쳐나서 혹시 안내 방송의 주인공이 아니신가? 하고 여쭸더니 맞다고 하셨다.
함열역 앞으로 펼쳐진 시내가 잘 정비돼 있었다. 시골 읍내라고 생각했는데 꽤 번성했던 곳이었다. 일단 점심식사를 할 곳을 찾아 나섰다. 어렵지 않게 골목에 위치한 식당 한 곳을 발견했다. 이름하여 청운식당. 청운의 꿈을 안고 살아가라고 지은 이름일까? 인생의 큰 전환점에 서 있는 큰 아이에게 두고두고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식당 이름이었지 싶다.
1인분에 만 5000원 하는 제육볶음 2인분을 주문했다. 근처 황등면이 화강암 석공산업 덕분에 돼지고기 요리가 발달했다고 하던데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제육볶음 한 입을 넣었을 때 적당히 향긋한 생강 냄새가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를 막아줬다. 제육볶음 위에 신선한 냉이를 얹어 있어서 더 구미가 당겼다. 입맛에 맞았는지 아이가 밥 두공기를 훌딱 비웠다. 식당 일을 돕고 계시는 할머니께서 밝은 미소로 우리에게 잘 해주셨다. 부족한 것이 없는지 살펴보시고 직접 가져다 주시는 모습에서 정성이 넘쳐났다. 저런 삶을 사시는 분이라면, 인생길이 험했을지라고 삶을 제대로 살아오신 분이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왔다.
생강 냄새가 뜬금없이 옛 얼굴을 떠오르게 했다. “강경이 생강으로 유명하지…” 군 복무 시절 우리 사무실에 자주 찾아오셨던 군무원 아저씨가 하셨던 말씀이다.
얹어 놓은 냉이가 향기로웠다. 손님을 대하는 할머니와 주인 아주머니의 태도는 오성급 호텔 이상이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허해졌다면 이런 접대를 받고 나면 훌훌털고 다시 일어설 힘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맛과 정성이 우러나는 훌륭한 식당이었다. 마음이 허할 때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계산을 하려는데 두 사람의 양에 맞게 적게 했으므로 2만 원만 받겠다고 하신다. 분명 공기밥 1개까지 추가하면 3만 1000원을 내야 하는데…. 맛있게 먹었고 충분히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느꼈는데!. 아이도 이게 시골의 정이나 보다 하고 감동해 하는 눈치다.
함열 시내의 함열성당이 볼 만하다는 글이 보였다. 도착하기 전에 인터넷에서 잠깐 살펴본 대로 근처에 있지 싶어서 행인에게 여쭸더니 가깝다고 하신다. 5분에서 10분 정도 걸어가자 볼링장에 가려서 역 쪽에서 안 보였던 함열성당이 나왔다. 1959년에 신축한 성당이라는데 새 건물 느낌이 났다.
좋은 벽돌로 정성을 들여 지은 느낌이 들었다. 터도 넓고 적당히 높은 곳에 지어져서 예전에는 함열 시내를 훤히 내려다 볼 만한 위치였지 싶다. 지금은 아파트와 높은 건물이 가리고 있지만, 그 지역에 꽤 고르고 고른 자리였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터가 무척 넓다는 점이었다. 성당 안내 이정표를 보니 운동장도 들어있다. 아니 성당에 운동장까지!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 있어서이지 싶었다. 한 수녀님께서 누군가를 배웅하러 나오시길래 달려가서 인사를 드렸다. 당신은 전교수녀가 아닌, 유치원을 돌보는 일을 하고 계시다고 하신다. 점심시간이라 아이들 돌보기에 바쁘신 거 같아 ‘학생과 차 한잔 하고 가라’고 권하시는데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성당문이 모두 잠귀어있는 이유에 대해 소개해주셨다. 시골 성당으로서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하신다.
성당 둘레를 둘러보는데 교육관과 유치원을 갖춘 꽤 신경을 쓴 성당이었다.
함열성당. 환갑을 넘긴 성당 건물이지만 마치 새 건물처럼 느껴진다. 지금도 주말마사에 400명이 넘는 신자가 나올 정도로 시골 본당으로서 규모와 전통을 가졌다. 함열성당은 100년이 넘은 전통을 가진 천주교회 공동체로서 현재 건물은 1959년에 신축됐다.
화려함보다 단아함과 정갈함이 빛나는 성당 입구. 여기서 드리는 혼배미사가 아름다울 거 같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면 성당 입구 양옆의 이름모를 상록수가 반기고, 바로 그 너머로 햇살을 받은 등나무 잎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풍경을 잠시 상상해 본다. 영화를 무척 많이 본 거 같다!
가장 아래 ‘운동장’이라는 이정표는 우리나라 지역 본당에서는 유일하지 않을까. 성당 주변으로 대나무 숲이 조성돼 있고 고목이 된 벚꽃나무에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블로그에 안내해 놓은 번호로 택시를 불렀다. 함라 옛담장길 마을로 가기 위해서다. 버스도 있는데 30분 넘게 기다려야 온다고 해서 7000원 정도를 내고 이동했다. 택시가 성당 북측 문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 쪽 골목길로 들어왔는데 널다란 국도가 성당 정문 앞으로 나 있었다.
조금 지나니 익산시청 별관이 보인다. 어떤 사연이 있나 알아봤더니 예전 익산군청이었다고 한다. 이리시와 익산군이 합쳐져 익산시가 되면서 2개 부서가 군청자리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택시 기사에 따르면, 익산시와 통합되면서 이곳 함열읍은 피해가 크다고 아쉬워했다.
10분 정도 달리는데 중간에 교도소 영화촬영 세트장이 보인다. 살짝 들어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애매하지 싶어 원래 목적지인 함라 옛담장기로 바로 갔다. 금방 도착했다. 택시 기사께서 골목 깊이 들어와서 홍보관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홍보관, 체험관 등 대궐 같은 새 한옥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죽담이라고 해야 할지, 돌담이라고 해야 할지 여튼 옛담장길이 펼쳐져 있었다. 최근에 새로 쌓은 담장은 깨끗했지만 어딘지 세월의 흔적이 덧씨워지지 않은 아쉬움 같은 게 살짝 느껴졌다.
세월이 준 선물
이 양지바른 곳에 꽃이 피어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정말로 옛담장을 구경할 만한 마을이다. 조 부잣집 본채 옆 담장. 소쇄원의 애양단(愛暘壇)의 정취에 버금가지 않을까?
집터만 놓고 보면 스케일이 큰 집들이 아닌가 싶다
이 마을에 1900년대 초반에 1만석꾼 부잣집 세 집이 있었다고 한다. 김가 이가 조가 세 집으로, 게 중에 조가 집은 대문이 없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개가 지키고 있었는데 눈을 마주치지 않고 들어갔다. 순한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생활하지 않은 느낌이 났지만, 집의 구조나 담장, 장생도 벽담, 별채 등 시골집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호화로운 구성이 눈에 띄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 방치된 느낌도 들었다. 그럼에도 당시를 생각해 보면 대단했을 거 같았다. 그 중에 본체 앞 뜰 옆에 위치한 별채는 일본풍이 느껴졌다. 사면이 모두 유리창으로 돼 있고 나바위 성당처럼 지붕에 살짝 한층을 더 올려 멋을 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파트 베란다처럼 유리창 안으로 다시 유리창 방을 낸 구조였다. 동쪽으로 작은 방 하나와 작은 군분을 넣는 부엌을 배치하고 나머지를 통으로 낸 구조여서 모임 장소로 사용됐지 싶었다.
마을 이름처럼 담장이 인상적이었다. 안동 하회마을보다 작지 않을 정도 규모였다. 하회마을처럼 잘 정비한다면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수많은 콘텐츠가 쌇인 마을이지 싶다.
들어왔던 길을 살짝 피해 동네 입구로 다시 나왔다. 버스 시간을 알아보려고 이발관에 들어갔다. 따뜻한 난로를 피워놓고 영업중이었다. 어렸을 적 이발소에서 보았음직한 액자도 보이고 머리 감는 곳도 예전 형태여서 마치 어렸을 때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큰아이도 정겹고 좋다고 이곳에 더 있고 싶다고 했다.
어르신 한 분이 이발하고 계셨다. 이발사분께서는 40년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서 그 전의 일은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 큰 집들이 모두 비어 있다고 아쉬워 했다. 3부잣집을 모두 들어봤냐고 하길래 대문이 없는 집만 본 거 같다고 했더니 99칸 김 부잣집에 꼭 가보라고 했다. 교회 건너편집이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셨다.
교회 건너편으로 궁궐 외벽처럼 느껴지는 사랑채가 있는 집이었다, 사랑채를 지은 재료들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근처에는 꽤 정성을 들여지은 비각도 서 있었다. 절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각종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있었다. 빗장이 걸린 대문틈으로 관광객들이 집안 내부를 들여다 보아서인지 대문만 반들반들하다.
근데... 작은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야, 연기 냄새가 이리 구수할 수가.... 갑자기 어디서 발동했는지 ‘계시나요?’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답변이 없으면 전화라도 할까 하여 차 앞에 연락처가 있나 봤더니 우리집에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아파트 스티커 태그가 보인다. 잘 됐다 싶었다.
바로 누구세요? 하는 답이 들려왔다. 지금 공사중이라서 소개해 드리기 어렵다고 하시는데 근처에서 온 객으로서 고3 아이와 함께 와서 잠깐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다고 매달렸다. 못이기겠다 싶었는지 빨리 보고 나오는 조건으로 직접 안내해 주신다. 할아버지 대에 지은 집이고 아버지께서 몇 년 전에 돌아가시며 어머지만 서울 근교로 올라와 계신다고 안내해주셨다.
아까 그 마을 홍보관을 내려오면서 건너편 담장 안의 향나무가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그 집 뜰에 들어선 나무였다.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이 바로 나오지 않고 두 세번 돌아들어가자 안채 마담이 보였다. 집을 크고 웅장하게 연출하기 보다 아늑하고 정감 있게 구성했다는 느낌을 줬다.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건물 뒤편을 돌아서자 곡식 저장고라는 별도 건물이 웬만한 작은 집 두 채 규모로 서 있었다. 그때의 위세가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었다. 약속을 지키지 위해 사진도 안 찍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돌아보고 가려는데 아까 그 향나무만은 그냥 놓치지 아쉬웠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큰아이에게 그 앞에 서보라고 하여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고맙다고 몇 번을 인사드리고 그곳을 떠나오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 군불을 넣고 치우는 자손의 정성 덕분인지 비교적 관리가 잘된 모습이었다.
버스를 타러 함라초등학교로 가는데 100주년 기념 현수막이 눈길을 끌었다. 운동장의 스케일이 웬만한 도시학교 운동장 두세 배는 되지 싶었다. 땅이 넓은 지역이라서 그런 건지 집터도 넓었는데 학교도 넉넉하게 공간을 배치한 모습이었다. 학교 앞의 향나무 등이 역사를 대변하면서 이 지역이 지금과 달리 예전에는 정말로 여유로운 고을이었다는 것을 대변해 주었다.
정확히 3시 40분에 38번 시내버스가 익산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산이 거의 없는 지역의 편도 1차선 도로를 달리는데 독특한 분위기가 났다. 어느 지역보다 묘소를 정갈하게 정비해 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더불어 석공예로 유명한 지역 답게 마을이나 작은 공장 앞에는 돌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중간에 요즘 전국 3대 비빔밥으로 통한다는 황등 육회비빔밥집들이 보였다. 황등면 소재지였지 싶다. 진미식당 간판도 보였다. 점심을 너무나 잘 먹어서인지 큰애한테 한 그릇 먹고 갈래? 했더니 생각이 없다고 한다. 중간에 캠퍼스를 잘 꾸며놓은 원광대 앞도 지나갔다.
익산역까지 50분 정도 걸렸지 싶다. 익산역 앞에 간판도 분명하지 않는 꽈배기집이 있었다. 현장에서 튀긴 꽈배기와 찰쌀떡 튀김 만원 어치를 샀다. 꽤 넉넉하게 담아주었다. 차에서 큰애와 꽤 먹었는데도 집에 가져오니 그 양이 적지 않고 맛도 좋았다. 팥 앙금이 듬뿍 들어 있는 고로께는 너무나 맛이 좋아서 인기 만점이었다.
5시 4분 용산행 무궁화를 탔다. 오늘 여행이 참 좋았다. 큰애한테 어디가 좋았는지를 묻자, 함라마을 옛담장길 울타리 너머로 보았던 촌닭들의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눈빛이 마치 자신의 눈빛처럼 여겨졌다면서. 수탉들의 벼슬이 꽤 화려해 보였는데 유심히 오랫동안 쳐다보는구나 싶었는데 잠시나마 닭들과 교감이 있었나 보다.
강경역을 지나면서 잠이 들었나 보다. 서대전을 지난 것을 어렴풋이 기억 났고 성안역에서 잠에서 깼다. 살짝 피곤했는데 자고 났더니 기분히 훨씬 좋다. 수원역에서 내렸다. 다행히 집으로 오는 전철이 잘 연결돼 지루함 없이 우리집에 금방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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