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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와 리츠파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 3월 연재글)

하느님을 사랑한 여성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3. 1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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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돌아가신 박완서 님의 소설 중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 차문경은 남편이 이혼을 요구해와 이혼녀가 된다. 남편은 유학 중에 한 여자를 만나 둘 사이에 아이까지 갖고 있었다. 문경은 남편과 이혼 후 우연히 대학동창 김혁주를 만난다. 둘은 결혼을 약속하고 사내 아이를 낳았지만, 혁주의 변심으로 문경은 또 다시 버림을 받는다. 

아이를 키우며 ‘싱글맘’으로 살아가던 문경은 또 한번 시련과 맞부딪힌다. 혁주가 가문의 대를 이를 목적으로 그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나타난 것이다. 문경은 아이를 뺏기지 않으려고 법정에까지 서게 된다. 문경은 예전에 혁주가 아이를 포기한다고 써 주었던 편지를 법정에 증거물로 내 놓으면서 승소한다. 

소설은 가부장 중심의 사회에서 당사자가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색안경을 끼고 이혼녀와 싱글맘을 대하는 냉혹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경에게 세상이 ‘나를 이해해 주겠지…’ 하는 착한 꿈에서 빨리 깨어나 ‘자신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해준다.

벌써 3천여 년 전이지만 이러한 꿈에서 스스로 깨어난 용기 있는 두 여성이 있다. 타마르와 리츠파가 바로 그 주인공들. 그녀들은 이방인이나 고아들처럼 보호가 필요했던 과부로서 가난과 굴욕의 삶을 살아야 했다(탈출 22,21-22). 

타마르의 지혜 

타마르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가문의 선조인 유다의 며느리다. 유다는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유다는 동생 요셉의 목숨을 다른 형제들로부터 지켜냈고(창세 37,26-27), 막내 동생 벤야민을 대신해 종으로 잡히겠다고 희생까지 자청했던 선한 인물이었다(창세 44,33). 하지만 유다는 첫째 아들 에르와 둘째 아들 오난이 차례로 타마르와 결혼 후 죽자 과부가 된 타마르의 인권을 외면함으로써 인간으로서 악한 모습도 보여준다. 

유다는 두 아들의 죽음이 며느리 타마르의 탓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난처한 처지의 타마르를 그의 셋째 아들과 혼인시켜 보호해줄 수 있었지만 친정으로 내쫓고 만다. 당시의 여자는 남편이나 아들이 있어야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여성의 경제 활동이 원천 차단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타마르의 인권을 외면했다(신명 25,5-10). 

하지만 타마르는 이러한 현실에 주저앉지 않았다. 타마르는 신전의 창녀로 변장해 시아버지로부터 아들을 얻는다. 이로써 그녀는 친정에서 얹혀 살던 신세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분 안에서 최대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그리고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창세 38,26)’는 유다의 고백을 받아낸다. 옳다(righteous)는 하느님 보시기에 ‘옳다’는 뜻이다. 며느리의 인권을 보장해 주지 않았던 유다는 하느님 보시기에도 옳지 않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유다처럼 선과 악을 함께 지니고 살아간다. 하지만 타마르는 이들을 곧바로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스스로 잘못함을 깨닫도록 도와줬다. 그녀 또한 자신이 살아갈 길을 그녀가 속해 했던 공동체의 문화를 이용해 찾아낸다. 그리하여 유다로부터 쌍둥이 아들 페레츠와 제라를 얻고 구세주의 족보에 당당히 여성으로서 첫 번째 이름을 올린 것이다. 

타마르처럼 우리도 자신을 억압하는 타인의 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절망하지 말자. 모든 것을 선으로 이루어 가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내하며 지혜를 모으면 구세사의 족보에 이름을 남긴 타마르처럼 주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리츠파의 소리 없는 외침 

타마르처럼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지만 사울의 후궁 리츠파의 말 없는 항거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녀는 사울의 후궁으로 두 아들을 얻었지만, 사울이 죽자 왕위를 탐낸 사울 사촌형의 후궁이 된다. 그 후 리츠파는 다시 다윗의 소유물로 전락한다. 다윗은 이스라엘 땅에 3년 동안 기근이 든 이유가 사울의 죄 때문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다윗은 사울의 두 아들, 즉 리츠파의 두 아들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죄 제물로 내줬다. 리츠파는 두 아들마저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2사무 21,8-9). 

신분은 높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리츠파 또한 굴곡진 삶을 살았다. 리츠파는 처형당한 자식의 주검 위에 비가 쏟아지지 않도록 자루옷을 덮어 놓고 밤낮으로 지켰다. 속죄 제물로 바쳐진 자는 땅에 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보리를 거두어 들였던 봄부터 비 내리는 가을까지 약 7개월 동안, 낮에는 하늘의 새가 밤에는 들짐승들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지킨 것이다(2사무 21,10). 

리츠파의 항거에 다윗은 마음을 돌려 나무에 매달아 죽였던 자들의 뼈들을 무덤에 묻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하느님께서는 그 땅을 위한 간청, 즉 이스라엘 땅의 기근 해소에 대한 기도를 들어주셨다(2사무 21, 12-14). 성경에는 그녀가 했던 말은 한 마디도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자식의 주검 앞에서 7개월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 침묵으로 항거한 그녀의 행동은 후대의 예레미야(예레 31,29-30)와 에제키엘(에제 18,2-4) 예언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로써 리츠파는 ‘아비의 죄로 인해 아들까지 심판 받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함’을 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포하게 하였다. 

꿈꾸지 말고 행동으로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삶의 소중한 선물인 새로운 생명의 출산도 포기하지 않았던 타마르(창세 38,12). 그녀는 그녀의 결혼생활의 실패가 자신의 탓이 아님을 알았기에 불필요한 자책감으로 자신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때가 되자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려 했던 시아버지에게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구세주 예수님의 족보에 여성으로 첫 이름을 올렸다(마태 1,3). 다윗왕 시대의 리츠파 역시 7개월 간의 말없는 항거로 이스라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2사무 21장). 

타인의 부조리와 약함까지 끌어안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타마르와 썩어가는 자식들의 시신 앞에서 정의를 목말라 하던 리츠파의 행동이 결국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과 연좌제의 폐지를 가져왔음을 떠올린다(신명 21,22-23).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모순을 끌어안아 서로가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미래를 열어가야 함을, 우리의 이기심에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는 행동에 조금이나마 동참해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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