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알리는 첫 사도, 막달라 마리아 | |||||||||||||||||||||||
[하느님을 사랑한 여성들-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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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리며 화사함을 뽐내는 봄이다. 봄은 매서운 겨울 추위를 견딘 모든 생명에게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교회도 수난과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축제를 지낸다.
‘사도’ 즉 ‘apostle’은 ‘파견된 자’ 또는 ‘보내진 자’라는 뜻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란 예수님과 공생활을 함께 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사람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열두 제자와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를 의미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모든 사람은 사도가 된다. 열두 제자와 바오로 역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을 체험하며, 제자에서 사도로 확실히 변화되었다(사도 1-2장). 주목받지 못한 여성사도들 예수님의 복음선포에 동참한 여성사도로는 자신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을 시중들었던 요안나와 수산나(루카 8,3)가 있다. 여기서 ‘시중든다’는 의미는 ‘섬기는 삶’을 요구한 예수님 제자직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라자로의 누이동생 마르타와 마리아(루카 10, 38-4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까지 함께 했던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마르 15,40-41)가 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고 이웃에게 예수님을 선포한 사마리아 여인(요한 4,1-42)도 사도가 된다. 이중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는 4복음서 모두에서 언급되며, 예수님의 부활 또한 가장 먼저 목격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막달라 마리아를 간음한 현장에서 붙들려와 돌에 맞아 죽을 위협에 처했을 때, 예수님의 지혜로운 한마디로 살아난 여인으로 착각한다(요한 8,1-11).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며 그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여인(요한 12,1-8)으로 생각한다. 아니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요한 11장 참조)로 혼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같은 이름을 가졌던 이런 여성들이 아니다. 단지 일곱 마귀에 들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던 한 고통스러웠던 사람일 뿐이다(루카 8,2).
그녀는 부유한 상업지역인 막달라 태생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영화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는 약소민족, 유다인이었다. 이방인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에 같은 동족에게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또한 그 당시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한 여인이었기에 말 못할 억압과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일곱 마귀로 표현되는 그녀의 고통은, 그녀에게 삶의 희망을 잃게 하고 여러 가지 육체적,정신적 한계 상황을 가져왔다. 그녀는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온전한 해방을 경험하게 된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 18 참조)”라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이에 마리아는 자신이 체험한 해방을 통해 구원자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았으며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보물이 든 밭을 산 사람(마태 13,44-46 참조)”처럼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사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그를 따르게 된다. “라뿌니”라 부른 여인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6-18). 그녀는 예수님이 체포되자, 흩어졌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성모님과 사도 요한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켰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새벽같이 “사랑하는 임을 향한 끝없는 갈망(아가 1,7-8 참조)”으로 그분의 시체에나마 몰약을 바르러 달려간다. 이런 그녀의 갈망과 열성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도와 준다. 빈 무덤을 보고서 그냥 돌아간 베드로와 사도 요한과 달리 그녀는 차마 그곳에서 발을 떼지 못한다(요한 20,1-12). 그런 그녀에게 무덤 밖에 있던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반적인 호칭인 “여인아”라고 부르신다. 그녀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선생님”이라고 대답한다(요한 20,14-15). 이에 예수님은 다시 직접적으로 ‘일곱 마귀를 해방시켜 주셨던 그녀의 그 구체적인 삶’ 안으로 들어오셔서 바로 그 체험의 이름 “마리아”를 불러 주신다. 그러자 그녀도 돌아서서 “라뿌니”하고 대답한다. 이는 ‘스승님’ 이라는 뜻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단순히 지식을 전달해 주는 선생님이 아니라 자신의 온 삶을 내어 맡겼던 바로 그 분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아가 말씀하신 대로 다시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신 분임을 실제로 깨닫고 고백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예수님의 뜻에 따라 부활의 첫 사도로 파견된다. '사도들의 사도' 막달라 마리아
<토마스 복음서>를 보면 여성에 대해 혐오적이었던 베드로가 여자인 마리아를 제자로 삼지말자고 예수님께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여성관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평등선언을 하신다. “내가 그녀를 ‘안드로포스’ 즉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하신다. 베드로의 모습에서 여자를 불완전한 인간으로 생각했던 당시의 상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성의 구분 없이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고 온전한 인간이 되는 기회를 주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의 깊은 뜻을 헤아렸다. <마리아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이방인들에게 왜 우리가 손해를 보며 복음을 선포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제자들에게 마리아는 예수님 부활의 참 뜻을 전하며 눈물로 호소한다. 그제야 사명을 깨달은 제자들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기를 결심하며 용기 있게 나선다. 그녀는 또한 오마 샤리프(Omar Sharif)가 주연했던 <성 베드로>라는 영화에도 나오듯이, 수난 당하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으로 괴로워하는 베드로를 따뜻이 격려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라셨던 사도들의 공동체를 굳건히 형성해 나가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마리아 복음서> 후반부에 따르면 그녀는 이제 예수님과 완전한 영적 일치를 이루고 침묵 속에 빠져 든다. 이는 <영혼의 성>을 집필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설명하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7개의 방중에서 제일 마지막 방인 7궁방의 세계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이 단계에서는 나를 잊어버리고 하느님 안에 완전히 잠기게 된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신학대전> 3부를 집필하던 중, 하느님의 발현신비를 조금 접하고 나서는 침묵할 수 밖에 없어 붓을 들지 못했다는 일화를 떠 올리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 되기 예수님의 사랑 받던 제자라고 불리던 요한의 복음서는 마태오, 마르코, 루카의 복음서와 다른 심오한 문체를 보여준다. 깊은 사랑을 받은 사람은 상대방의 깊은 실체를 이해한다. 막달라 마리아도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주신 구원자 예수님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체험했다. 그래서 죽기까지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이 세상에서부터의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71년 대구 출생, 가톨릭대 신학과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서강대 신학대학원을 수학하였다. <주석성서> <미사의 신비> <성찬의 9일 기도> <연옥을 피하는 방법>의 편집과 번역을 담당하였다. 2011년 3월 세명의 자녀들과 함께 한 전국 성지순례책 <햇살 속으로>를 집필하였으며 가톨릭 영성을 담은 책을 기획 출판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http://oturo.co.kr/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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