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로 유명한 신유박해 순교자이며 1775년에 태어나 1801년에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 당하였다. 16살에 진시에 합격할 정도로 글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왕이 친히 그 재능을 어여삐 보아 손목을 잡고 ‘20세가 되면 일을 시키고 싶다’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그 후로 순교자는 손목에 늘 명주를 감고 다녔고 이 명주는 1980년 후손들에 의한 무덤발굴에서도 발견되었다. 1790년경 신앙을 접한 후 신앙공동체 확립과 신심생활에 충실했으며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배론의 토골에서 은신하다 체포되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하얀 비단에 쓴 백서에는 신유박해에 대한 기록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외세의 개입을 언급하여 많은 지탄을 받았고 극형에 처해지게 된다.
경기도 장흥에 위치해서 남종삼 성인의 묘와 멀지 않은 곳에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의 묘가 있다. 여름날 장대비가 내리다 말다 해서 미처 우산을 1개 밖에 준비해 가지 못한 우리가족은 사진을 찍는 아빠를 제외하고는 야외용 돗자리를 머리에 둘러쓰고 차 밖으로 나왔다. 분명히 ‘황사영 알렉시오 묘’라는 푯말이 있었는데 입구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 한참을 헤매는데 길이 막혀 있을 것 같았던 버드나무 추어탕(?)음식점 오른쪽 뒤로 작은 입구가 있었다. 선조의 묘는 2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자리잡고 있다.
일찍이 진사에 합격해서 명성을 얻었고 임금님의 총애까지 받은 그는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장녀인 정난주와 혼인하였다. 정난주의 어머니는 이벽의 누이이고, 황사영의 어머니인 이윤혜는 이승훈과 일가인 이동운의 딸이었다. 이러한 가족배경으로 이승훈으로부터 교리서를 얻어보며 신앙을 접하게 된 그는, 과거공부를 멀리한 채 열심히 교리공부를 하고 1795년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선조의 집은 항상 교리 배우는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었으며 선조는 중인계급 및 상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신자들과도 가까이 지냈고, ‘명도회’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진정 선조는 신앙을 열심히 실천하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극도로 존경하며 모시던 주문모 신부님도 자수하고 정약종,최필공,홍교만, 홍낙민,이승훈등이 참수 되었다는 사실을 배론의 토굴에서 전해들은 그는 큰 충격에 휩싸여 조선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청과 서양세력의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작성하게 된다. 누구보다 강렬하게‘신앙이 기반이 된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었지만 신앙의 자유는 80여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에 찾게 된다.
황사영을 체포한 후 백서를 발견한 조정에서는 특히 외세를 동원해 신앙의 자유를 획득 할려고 했던 주장에 대해 분노하였고 능지처사의 극형을 당한 뒤 모친과 부인은 각각 거제도와 제주도의 노비로 유배되고 두살짜리 아들은 추자도로 흩어졌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교회사 학계 일부에서는 황사영 선조가 반민족적인 사상을 지녔다는 비판에서 벗어나 노론중심의 양반중심 체제를 천주교에 토대를 둔 국가와 사회로 바꾸고, 굳게 닫혀있는 근대의 문을 찾고자 했던 행위로 인식되기도 한다.
우리가족은 아직도 외롭게 자리잡고 있는 듯한 선조의 무덤 앞에서 간단히 주모송을 바치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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