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그 밖의 성지

성지_햇살속으로/수도권

by 열우 2010. 8. 30. 16:24

본문

l  광희문(이름없는 순교자들의 믿음자리)


 

태조 5년에 축조된 총18Km에 이르는 서울 성곽은 4대문 사이로 4개의 소문을 두었는데 그 중 동남쪽에 위치해 있던 소문이 광희문(光熙門,수구문)이다. 박해 당시에는 서울 성곽 안에 묘를 쓸 수 없는 제도가 있었기에 시신을 서소문과 광희문을 통해서만 밖으로 내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시신을 내어가는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屍軀門) 또는 수구문(水口門) 리라고 불렀다. 이곳을 통해 이름 모를 수많은 치명 순교자들의 시신이 짐짝처럼 내던져지며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서울과 경기지방에서 체포된 수 많은 신자들이 도성 안에서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며 배교를 거부하고 하느님을 향한 신앙 하나로 생명을 초개같이 버렸다. 이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했고 시신마저 거적으로 싸서 매장되거나 그대로 버려졌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l  당고개 성지(아홉 성인의 순교 터)


당고개 성지는 용산구 신계동 일대로 현재 용산구청에서 삼각지역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이다. 1839년 이곳에서 순교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는 중인출신으로 교리지식이 깊어 다른 신자들을 인도했고 회장직을 수행했다. 형제간으로 같은 장소에서 순교한 홍병주 베드로,홍영주 바오로형제는 서울양반가문 출신으로  신유박해 순교자 홍낙민의 손자들로 회장직을 역임하며 선교사들을 도왔다. 함께 수계생활을 하였던 권진이 아가타, 이경이 아가타성녀와 가족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던 손소벽 막달레나 이인덕 마리아성녀, 체포된 교우의 옥바라지와 시신수습을 했던 이문우 요한 회장, 이렇게 아홉분이 성인품에 오르신 거룩한 장소이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인덕 마리아가 참수된 곳이다.


당고개 성지 순교기념비가 있던 자리는 주변 아파트 건립공사로 철거되고 아파트 단지가 정리된 2011년 다시 성지가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비신자들도 쉽게 와서 신앙인들의 믿음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당고개 성지에서는 비록 성인 품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모성애의 유혹을 딛고 참수되는 순간까지 믿음을 증거한 이성례 마리아 선조의 가족애가 떠오른다.  옥중에서 죽어가는 갓난아이를 보며 어린 네 자식들에 대한 염려로 잠시 배교를 하지만 곧 뉘우치고 순교하기까지 굳셈을 지켰고, 어린 네 자녀들은 동냥 받은 쌀과 돈을 모아 어머니의 목을 벨 희광이를 찾아가 ‘’우리 어머니가 아프시지 않게 한칼에 하늘나라에 가도록 해 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아무리 무심하고 거친 희광이 들이라도 이에 감동하여 밤새 칼을 갈아 약속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자식을 둔 어머니에게는 눈물겨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l   포도청(많은 순교자들이 옥사한 자리)


조선시대 한성부의 치한을 담당하는 부서로 원래는 강도나 살인범을 취조하고 가두던 곳이었지만 순교자들도 대부분 이곳을 거쳐서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좌포도청(지금의 단성사 일대), 우포도청(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자리)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곳에서 심문을 받은 뒤 상급기관인 형조와 의금부로 이송되어 확정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한국 성인 103위 가운데 23명이나 이곳에서 옥사했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따르면 좌.우포도청의 옥에서 고문으로 순교하거나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수가 참수형이나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것)을 받아 순교한 신자 수보다 훨씬 많았다고 전한다.


이제는 번화한 도심 한복판에서 표지석만 남은 흔적이지만 200 여 년 전 신앙을 지키고 하느님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던 선조들의 고통이 떠올라 저절로 숙연해 진다. 아무것도 해 되는 것이 없는데도 믿음을 지키는 것에 열심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을 반성하며 선조들의 의로운 고통과 피가 이세상의 어리석음과 죄의 어두움에 큰 보속이 되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l  제물진두(천주교인들에 대한 공개 처형장)


병인박해를 계기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대원군은 많은 신자들을 공개 처형했는데 이는 서양세력에 대한 배척과 천주교 금단(금단)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문서와 고증에 의하면 처형터는 인천 중구 항동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남서 방향으로 약 50m 지점으로 추정되고 박순집 베르로의 외가 쪽 집안과 이승훈 베드로의 후손들이 치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