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재성지는 신유박해(1801년)때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출생지이다. 그는 형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과 함께 1779년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여 권철신, 권일신, 이벽 등과 함께 한역서학서를 접하며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 1786년 하느님을 받아들이기로 굳게 마음먹은 후 형인 정약전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그 후 누구보다 신앙공동체를 위해 헌신했고 믿음을 지켰으며 두 아들과 딸 그리고 부인까지 순교하는 성가정을 이룬다.
정약종 성인은 비록 약전과 약용형제들보다 세례는 늦게 받았지만 오히려 배교하지 않았고 과거와 관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충실하였다. 이로써 1795년 서울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비밀선교활동 조직인 명도회의 회장으로 그를 선임하였다. 성인은 교리해설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1797년 한문에 어두운 서민들을 위한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작성하는데 이를 읽고 많은 사람들이 교리를 더욱 바르고 쉽게 이해하였다. 또 아드님이신 정하상 바오로 성인도 순교하시기 얼마전에 <상재상서>를 지어 하느님의 진리를 논리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등과 함께 잡혀 주문모 신부님의 거처를 대라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의연히 천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하였다. 2월 26일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할 때에도 “스스로 존재하시고, 무한히 흠숭하올 천지 만물의 대주재자이신 천주께서 여러분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십니다. 당신들은 회개하여 당신들의 근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근본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을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오”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또한 큰아들인 정철상도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성실히 하다가 1801년 4월 2일 부친이 순교하신 곳에서 같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분들은 모두 1984년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으니 이미 같이 계신 영광스러운 천상에서 기뻐하셨을 것이다. 또한 생가 맞은편에 자리한 실학박물관에 들렀는데 최신식 시설을 완비하고, 우리나라에 도입된 실학의 유래에서부터 그 활용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마침 다산정약용 선생님의 여유당집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어 초기 천주교 공동체에 깊이 관여했던 정씨 3형제의 관계를 다시 한번 묵상할 수 있었다. 또한 생가터 위쪽에는 대 실학자 정약용 세례자 요한의 묘소가 있다. 그는 초기 천주교 공동체의 일원이었으나 배교하였고 임종 때에 중국인 유방제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아이들은 실학의 개념과 그 발명품 등을 돌아보았고 정약용 선생님의 안경 쓰신 초상화 퍼즐 맞추는 놀이에 푹 빠져서 재미있어 했다.
한옥으로 단아하게 지은 마재성당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글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가족은 참례하지 못했지만 성당에서는 매일 11시에 미사가 있다고 한다. 미사를 참례하고 성지를 순례하면 성인들의 좋은 기상을 더욱 본받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성당 맞은편으로 편안히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우리가족도 언젠가 가꿀 수 있는 정원이 생긴다면 꼭 그렇게 만들고 싶을 만큼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십자가와 화관을 쓰신 성모님 상이 화사했고 뜰에서 바로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만들어진 아담한 십자가의 길도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옥수수를 뜯어먹으며 언젠가 우리집도 하느님을 찬양하고 묵상할 수 있는 작은 공간으로 꾸며보자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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