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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내발을 씻기신 예수” [서울 1]

성지_햇살속으로/수도권

by 열우 2010. 8. 3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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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알아두세요~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의 성당에는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제단에 모셔져 있다. 사제를 지망하는 신학생들이 매일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올바른 사제성소의 꿈을 키워나간다. 가톨릭대학 성신교정의 모태는 1855년 충북 배론의 교우촌에서 출발한 성 요셉신학교이다(아래 세 번째 사진 참고).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를 거쳐, 1945년 오늘날의 혜화동 경성천주공교신학교로 자리잡았다. 1947년에는 성신대학으로, 1957년에는 가톨릭대학으로, 1995년에는 섬심여대와 통합하여 성심∙성의∙성신교정을 가진 가톨릭종합대학으로 부상하였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90-2(02-740-9714) 
순례의 핵심: 성당 제단에 안치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
주의할 점
신학교라는 특수성으로 성소주일이나 축제 때에만 일반인에게 개방



우리 가족의 첫 순례지는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모셔진 성당이 있고, 그곳에서 거룩한 성소의 삶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우리 가족의 성지순례 취지와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성신교정은 나의 모교이기도 하다.

차로 이동하면서 묵주기도 5단을 바치고 아이들에게 오늘 순례할 신학교에 대해 간단하게 얘기해 주었다. 신부님이 된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모신 성당을 순례하러 가는 것이라고 하자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주일학교에서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며 초등학교 3학년인 오빠와 2학년인 그 누이 동생이 아는 체를 한다. 신앙 때문에 젊은 나이로 목숨을 잃은 것에 대해 애기해주었다. “아무리 순교자들이 신앙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죽는 것은 슬픈 것이지 설마 싱글벙글 하면서 돌아가시겠냐?”고 둘째 소은이가 말한다. “그렇긴 하지만 순교한 즉시 천국에서 행복하게 사실 것이다”라고 덧붙이자 듣고 있던 큰아이가 “순교자 분들은 죽자마자 하늘나라로 고고 씽(Go Go 씽)”이라고 말한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맞다! 순교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확실하게 깨달은 분들임에 틀림 없다. 

학교 교문에 도착하니 학교 다닐 때 안면이 있던 ‘수위 아저씨’께서 그때처럼 교문을 지키고 계셨다. 10여 년 만에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수정원 앞에 세워진 성신중고등학교 터였음을 알려주는 기념비


운동장 담 아래 길을 따라 매점 앞의 수정원에 차를 세웠다. 요즘, 강아지나 토끼를 키우기 편한 단독주택으로 이사하자고 졸라대는 7살 막내가 푸른 잔디밭을 보더니 우와~하고 뛰어나간다.



배론성지에 있는 초대 신학교 모습


막내: 엄마, 여기 좋다. 우리, 여기서 살아요. 둘째: 여긴 대학교란 말이야!
아빠: 정민아, 여기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데?
막내: ?
엄마: 음… 신부님이 되면 살 수 있을 거야.
막내: 아~니… 그거 말고!

정원 한편의 성모님께도 인사 드리고 신학교 성당 뒤편 연못 근처로 차를 옮긴 후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를 보며 녹음으로 우거진 낙산성벽 길을 걸었다. 아이들의 아빠도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좋다며, 이곳 저곳 사진을 찍었다.




성신교정 성당 앞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상


드디어 김대건 신부님을 만나는 차례다. 신학교 본관 동쪽에 자리한 성당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영광스럽게도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우리가족끼리 바라볼 수 있었다. 학교 다닐 때에는 가까이 가보지 않았던 김 신부님의 유해를 이제야 이렇게 가까이 뵙고 경배를 드린다.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사를 조선에 모셔오고자 했던 그분의 노력, 목자 없는 양과 같았던 신앙의 선조들에 대한 사목자로서의 사랑, 눈 덮인 겨울날 당신을 인도해 주셨던 성모님께 대한 그의 특별한 공경의 마음이 떠오른다. 신부님의 유해 앞에서 나와 우리가족을 봉헌하며 우리 한 가족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길 기도했다.

실제 크기로 건조, 전시된 라파엘호(제주 용수리 포구 성지)


나는 가톨릭대 신학부 94학번이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신 후 홀로 고생하며 우리를 돌보시던 어머니마저도 내가 고교 2학년 겨울방학을 맞을 무렵 두 번째 뇌출혈로 쓰러지고 마셨다. 두 번째이다 보니 재활 가능성은 더 멀어졌고, 꼼짝없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나뿐인 딸로서 내가 어머니 간병을 전담하게 되면서 대학 진학도 또래 친구들보다 4년이나 늦어졌다.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육체의 고통,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절실히 생각하게 되었다. 미래가 불안하기만 했던 나의  20대 초반 간병생활 중에는 화사한 젊음을 누리는 또래들이 무척 부러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처럼 간병의 경험은 이후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이 한 몸을 어떤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미리 단련시킨 시간이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이 한 몸, 어떤 곳에 어떤 용도로 쓰시더라도 당신께서 부르시면 ‘예’하고 달려나갈 것이다.

힘들게 다시 시작한 공부에서 신학을 택한 것은 어머니 간병을 통한 깨달음 때문이었다.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며 깨달은 것은 ‘이 세상의 가치들은 영원한 게 아니기 때문에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근원이 하느님이어야 한다’였다. ‘하느님만이 나와 내 인생의 주님’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학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어서 택한 것이 바로 신학이었다.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이 나에게 큰 은총을 주신 것이다.
 

교정 곳곳에 외줄을 타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나팔꽃이 보였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집전해주셨던 입학미사가 생각난다. 신입 신학생들 가운데 외동아들이 삼분의 일 정도 되었다. 대가 끊기는데도 외동아들을 봉헌한 부모님들의 믿음을 추기경님께서 축복해 주셨고 감사의 말씀을 하셨다. 이 믿음은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나라의 첫 사제가 된 신앙의 선조, 김대건 신부 이래로 우리 후손들에게도 줄기차게 전해 내려오는 전통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특별한 날이면 김수환 추기경께서 학교에 방문하여 직접 미사를 집전해주셨다. 신학생들은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추기경님 앞에서 미래 준비해 놓은 ‘특송’을 하며, 추기경님은 외출 또는 특별휴가로 신학생들을 격려하시곤 했다. 사제의 길로 들어서려는 후배들을 위해 인간적인 정도 감추지 않았던 김 추기경님의 모습과 그의 인자했던 웃음은 생각만 해도 마음을 따뜻해지게 한다. 스승의 날이면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즐겨 불렀던 신학생들의 그 순수했던 마음도 무척 그립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기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 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육체와 마음의 교만이 유혹하는 이 세상에서 진리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아파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힘이 되고자 하는 신학생들! 이들의 순수한 모습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지혜와 부르심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현실로는 고달팠지만 주님 안에서 행복했을 김대건 신부님의 일생도 다시 떠올려 본다.

성신교정 신학교에는 깨끗한 강의실과 많은 도서를 비치하고 있는 도서관 외에도 빼놓을 수 없는 전통이 있다. 그 전통은 기말고사 때마다 한두 마리씩 어디론가 사라졌던 ‘멍멍이들’을 통해 확인된다. 특별한 영양식이 없었던 한국 초기교회 사제들이 지친 복날 보신탕을 드시곤 했다는데, 그걸 기억하기 위해 그들만이 갖는 행사가 아닐까?

가을이면 떨어진 단풍잎을 밟으며 산책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성벽 길과 연못도 성신교정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소박했지만 공동체를 느낄 수 있었던 즐거운 축제기간, 봄가을이면 축구대회가 한창이어서 꼭 한두 명의 신학생이 목발을 짚고 나타나곤 했다. 가을이면 긴 코트 깃을 세운 교수 신부님 뒤를 따라 수단자락을 날리며 운동장을 가득 채우던 신학생들의 산책시간도 떠오른다. 그 모습이 보일 때마다 ‘가을이 깊었구나’하고 느끼곤 했다.

교회사에서 다산 정약용 선조와 이승훈 선조께서 성균관 근처의 반촌(지금의 혜화동 부근)에서 교리공부를 하고 다른 젊은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200여 년 전에 벌써 이곳을 후손을 위한 터전으로 닦아놓으신 걸까. 바닥에 완전히 엎드려 자신의 온 삶을 봉헌하는 서약식장의 새로운 사제들처럼, 신자들도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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