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코오롱타워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해 10시 5분에 화성 양감면에 자리한 요당리성지에 도착했다. 과천-봉담 간 도로를 타고 가다 비봉 나들목 쪽으로 빠져 39번 국도로 남쪽으로 조금 달리면 요당리가 나온다. 지도로 보면, 서평택 나들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발안온천에 다닐 때 지나다녔던 길인데, 이곳에 성지가 있는지를 몰랐다. 주변에 창고와 공장이 있었지만 한적한 농촌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근처에 논밭이 많아 예전에는 교우들이 살기에 괜찮은 곳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바닷길이 멀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바다와 가까워서 다른 교우촌과 연락이 쉽고 박해시절에는 배편을 이용해 피하기도 유리해서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지금은 발안천 하류를 막아 조성된 남양호가 물길을 막아버렸지만 예전에는 강 하구를 따라서 이곳 근처로 배가 드나들었음 직하다.
어느 해, 수리산성지 교우촌 터를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곳이 요당리로 가는 길목 역할을 했다는 소개를 받았다. 언젠가는 요당리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역 성지순례차 이곳을 찾아오게 돼 그 바람이 이뤄졌다.
11시 미사를 1시간 정도 앞뒀기 때문에 성지 잔디광장 중앙의 성모님 상 앞에서 미리 단체 사진을 찍고 영광의 신비 묵주 기도를 함께 바쳤다. 이곳 성지는 외부와 향나무로 자연스럽게 경계를 짓고 있어서 아늑한 느낌이 났다. 향나무 안쪽으로 5미터 정도 사이를 두고 단풍나무 아래로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이 마련돼 있어서 한여름에도 햇볕 걱정 없이 기도드릴 수 있을 거 같다.
성지성당이 그곳과 잘 어울리게 예쁘고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성지 조성 당시, 이 성지의 특성을 드러내는 성당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과천의 한 자매께서 봉헌함으로써 지어졌다고 한다. 그 자매는 당시 사업이 잘 풀려 그 중 얼마를 봉헌하려했는데 꿈에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짜게 내는가?” 하고 말씀하셔서 큰 맘 먹고 성지 성당을 봉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당 입구에 봉헌 감사비가 서 있었다.
성당은 천장이 높아 밝고 쾌적한 기분이 들었다. 제대 뒤편 십자고상이 십자가 아니라 일자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상당 제대 뒷벽이 둥근 원형이라 1자형 십자가가 더 어울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날 별양동성당 순례객 외에도 일산 대화성당과 양주 등지에서 온 단체 순례객이 많아서 넓은 성당을 거의 채웠다. 이곳 성지는 순교성지가 아닌 교우촌이었던 것을 기념해 조성됐다.
▦ 약현성당 화재 시 타다만 목재로 만든 소성전의 14처
이곳 출신이었던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한 분인 장주기 요셉 성인을 기리고 있었다. 요셉 성인께서는1827년께 고향인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1836년 회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1843년부터 1866년 순교할 때까지 23년간 제천의 배론 신학교에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도와서 신학교 한문교사 겸 선교사들의 집주인 역할을 했다. 1866년 3월 30일, 충남 보령의 갈매못성지에서 다블뤼 주교 등 4명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 장주기 요셉 성인(출처: 요당리성지 홈페이지)
이웃사촌들과 함께 옛 신앙 선조들의 얼이 서린 이곳 요당리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미사를 함께 드리는 복된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은 그때 그 신앙촌 아이들이 되어 성지 잔디 마당을 뛰어니며 놀았고, 어른들은 점심 식사 후에 성지 옆마당에 설치된 천막 아래서 간단한 다과를 나누며 친목을 다졌다.
그곳에서 2시 40분께 출발해 과천에 4시가 못 되어 도착했다. 버스 두 대로 나눠타고 탈 없이 다녀온 이번 요당리 성지순례의 기억은 평생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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